전후(戰後) 시민차원의 국제교류 기틀을 만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매도시 교류였다. 최초의 자매도시 체결로부터 50년이 경과한 오늘날에는 교류 내용이 상당히 변질되어, 그 존재의의에 대하여 의문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자매도시 제휴는 과연 지역 사회에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지 그 평가를 해야 하는 시기에 와있다.

일본에서 최초의 자매 도시는 나가사키(長崎)시와 미국의 세인트폴 간에 1955년 12월 7일에 체결되었다. 미국측에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 개전 기념일인 12월 7일 처음으로 일본의 나가사키와 자매도시를 체결한 것은 일미 관계의 수복 의도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1950년대에 27건의 자매도시 제휴가 이루어졌으며, 그 상대는 미국이 21건으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다음은 독일이 3건, 프랑스 2건, 오스트레일리아 1건으로 되어 있다.

 

 

자매도시 교류의 원류 탐구

 

당시 자매도시 교류는 미국에서는 외교정책의 일부로 추진되었다. 1956년 11월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당초 미국과 소련의 시민간 교류를 촉진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People to People’ 사업이 개시되었고, 자매도시 교류는 그 중심 사업으로서 거국적이고 적극적으로 시작되었다.
소련과 제1차 해빙기를 맞이했던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시민에 의한 풀뿌리 교류를 외교의 일환으로 삼았다. 미국과, 미국으로의 이민에 근원이 된 유럽 도시 사이에 자연발생적으로 발전된 자매도시는, 그 후 외교정책으로 대두되게 된다. 대통령은 정부의 외교 노력만으로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일반 시민간의 교류와 상호 이해가 세계 평화 수립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가사키시와 세인트폴의 자매도시 제휴 이후, 미국 정부의 제휴 추진 방침에 따라 재일아메리카센터가 고베시와 시애틀(1957년), 오카야마시와 산노제(같은 해), 고후(甲府)시와 데모인(1958년) 등의 제휴를 알선했다.

 

그렇다면 일본측은 어떠한 의도로 자매도시 교류를 하고자 한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평화의 재구축」이다. 종전 후 일본에서는 두 번 다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평화에 대한 희망이 국민적인 합의를 이루었다.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를 만들고, 빠르게 국제사회로 복귀하는 것이 정부 및 국민의 공통된 바람이었다. 따라서 외국과의 친선교류를 정부차원에서 만이 아니라 시민 레벨로까지 깊이를 더하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미국이 먼저 손을 내민 자매도시란 아이디어에 자치체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크게 찬성했다.
두 번째 이유는 자매도시는 일반 시민이 외국을「손에 닿는 존재」로서 인식한 효과였다. 일본은 전후에 외국과의 무역, 경제교류를 활발하게 함으로써 평화롭게 번영을 구축해나가겠다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무역대국이라고 해도 일반시민은 외국여행의 기회도 없고, 외국인이 일본의 지방 도시를 방문하는 일도 드물었다. 자매도시를 갖게 됨으로써 상호 방문을 하고, 일반 시민이 외국인과 접하는 기회를 만들어 나간다는 점에서 자매도시 교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외국에 나가는 일이 매우 한정된 시대라서 자치체의 수장 등으로 한정된 사람들만이 나갔지만, 외국을 방문하여 새로운 정보와 접하는 것은 일본 지역사회의 미래상을 그리는데도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종전 후 폐색 상황하에서 지역사회나 일반 시민이 이국문화를 접할 수 있는 장치로서 자매도시 교류는 상당히 유효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외국과의 교류가 한정된 시대에 이니시어티브를 둘러싼 자매도시 교류라는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비로서 시민차원의 국제교류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초 일본의 자매도시 파트너는 미국이었는데 과학기술, 민주주의, 생활양식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국제교류라는 말이 갖는 화려한 이미지, 또는 해외 도시와의 제휴 자체가 국제도시라는 신분 면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당시의 자매도시 교류의 열의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58년 요코하마시와 미국의 샌디에고가 자매도시를 체결할 때,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샌디에고의 대표단 19명은「성조기는 영원하라」는 밴드 연주에 환영을 받고 체결식에 임했다. 대표단은 요코하마 인상을「많은 관중이 우리를 환희의 목소리로 맞이해주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하고 있다.

 

지역의 폐색감을 타파한다

 

외국과의 교류가 한정되었던 시대에는 자매도시 교류는 지역사회가 국경을 넘어서 문화가 서로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하기 위한 유효한 장치였다. 그러나 그 후, 지역사회로서 이국문화를 뛰어넘는 의미는 보다 복잡하고 다양하게 변화하였으며, 그 결과 자매도시 교류의 모양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국제친선에 깊이를 더해주고 외국과의 교류를 하는 자체에 큰 의미를 갖는 시대는 끝이 나고, 국제교류를 지역사회 발전으로 이어지게 하려는 시대가 찾아온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점차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한「지역 국제화」가 그것이다. 자매도시 교류 이외에도 자치체나 시민단체에 의한 다양한 국제교류 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역사회로서는 그 목적이 외국과 교류하는 것 자체가 지역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시점으로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역의 국제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그 근간에는 국제교류를 바탕으로 폐색감을 타파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기 농촌지역에서 청년층에 의한 활발한 국제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좋은 예이다. 평소 마을 장로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청년층이, 장로로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국제교류 사업의 기획과 실시를 통하여 집결, 새로운 지역부흥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외국인을 지역으로 초대하고, 이국문화를 지역사회에 받아들임으로써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리는 동시에 지역의 역사ㆍ문화의 좋은 점을 재발견하려는 목적으로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국제교류가 이루어졌다. 농촌을 방문하는 외국인은 일본인이 경시하기 쉬운 일본 문화나 전통을 평가함으로써 그 소중함을 많은 주민이 배운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새로운 시점을 적용시킴으로써 지역에 새로운 발상이나 연대감이 생겨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가고시마의 색감자 교류는 농촌 청년이 스스로 커뮤니티에 대한 자신감과 자긍심을 갖게 됨으로써 농촌국제운동으로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후 아시아 농촌에 대한 국제협력으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자매교류활동으로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사업으로 청소년 교류가 있다. 외국인을 보고「뒤로 빼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말을 건넬 수 있는 젊은이를 육성하는 것이「국제화시대」에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지역 청소년의 영어능력 향상과 이국문화에 대한 체험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자매도시에 대한 방문이나 방문처 홈스테이 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자매도시 교류는 선진적인 정보를 입수하는 수단으로도 활용이 되었으며, 해외 선진 지역에 대한 시찰ㆍ연수가 자치체나 지역단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980년대에 해외여행의 대중화가 진행되고, 해외 시찰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자 시찰이나 연수의 이름을 빌린 관광여행 성격의 여행 사업도 많아지게 되었다.

 

遠近(wochi kochi) 제3호(Feb./ Mar.'05)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