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나카노 아리(와세다대학 비상근강사)

 

베트남을 바라보는 시선
올해 초(2006년) 한 신문사가 주최한 베트남 전쟁 사진전이 도쿄도내에서 열렸다. 유감스럽게도 1975년 전쟁이 종결된 후에는 외국 보도진이 베트남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전시된 사진도 같은 해 4월 30일의 사이공「해방」에서 끝나있으며, 나머지는 도이머이(Doi Mo) 정책하의 활기 넘치는 현대 풍경을 찍은 작품이 몇 점 전시되어있는 정도였다.
베트남에 대한 일본인의 일반적인 이미지는 75년까지의 베트남 전쟁의 비극과, 86년 이후 도이머이 정책하의 경제발전 둘 중 하나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베트남 전쟁 종결부터 도이머이 까지의 10여년간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애초에 어떻게 도이머이가 시작되었는지 그 당시의 사정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사이가 공백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베트남은 미군에 이겨 남북을 통일하고 민족해방과 사회주의혁명을 이룩하며 소련의 붕괴 후에도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며 성공한 나라라는 인상조차 주고 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혁명이라는 신화
현재의 베트남 공산당정부(이하 하노이 지도부)는 미군을 쫓아내고 남부를「해방」시킨 승리자로서 전쟁을 종결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군사적인 지도가 반드시 우수하였던 것은 아니며 적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월등하게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
그것은 조국독립, 민족해방이라는 대의가 우선시 되어 그로 인한 개인 목숨의 희생을 강요 당한 결과이다. 전쟁이 장기화 됨에 따라 북베트남에서 징병들의 도주나 부대에서의 탈영, 병사들의 범죄가 증가한 것도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전쟁이 1년만 더 길어졌더라도 북베트남군은 자기붕괴 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하는 역사가도 있다. 베트남 혁명세력이 전쟁에 승리했다기 보다는 미국이 단념하고 물러날 때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미국의 전쟁 정책에 반대한 일본인의 대다수는,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에 저항하는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에 공감하였으나, 전후의 하노이 지도부는 해방전선의 공적을 일절 묵살했다. 해방전선이 중심이 되어 만든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는 중립의 남베트남이 일정기간 존재하고 남북의 대화에 의하여 통일에 이른다는 청사진을 제시하였으나, 실제로는 북이 남을 무력으로 제압한 결과가 되었다.
많은 일본인들은 그러한 사실을 그냥 지나치고「미국 침략전쟁의 희생양이 된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베트남」만을 보려고 한다. 그로 인해 지금도 베트남에 가난한 이들이 많은 것은「미국의 침략과 경제봉쇄 때문」이며, 공산당 관료의 독직은「구 남베트남의 자본주의 악영향 탓」, 베트남의 장애자들은 모두「미군이 살포한 고엽제의 희생자」라고 믿어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하노이 지도부는 미국제국주의에 승리하고 민족해방과 사회주의혁명을 실현한 베트남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냈으나, 일본을 비롯한 외국 시민들이나 미디어 또한 그 신화의 독주를 도운 것은 아닐까.

 

캄보디아 진격과 국제적인 고립
베트남 전쟁 종결 후의 하노이 지도부는, 베트남에 진 미국제국주의는 세계적인 수준에서도 쇠퇴를 피할 수 없게 되어 사회주의에 유리한 시대가 도래했다고 인식했다. 그리고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사회주의혁명의 리더라고 자인했다. 그러나 승자로서의 자각은 내외정책에서 다양한 오산을 불러일으켜「전후 베트남」에 진정한 전후의 의미를 야기하진 못했다.
외교적인 면에서의 과실은 우선 미국과의 관계수복에 실패한 점이다. 전쟁이 끝나면 가능한 한 빨리 강화조약을 맺어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규칙이건만, 하노이 지도부는 미국이 베트남 전후 부흥에 공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로 대미교섭에 임하고, 그로 인해 대화는 암초에 걸리게 되었다.
다음 과실은 중국과의 관계악화와 캄보디아 진격이었다. 중국과 베트남 공산당은 60년대부터 혁명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다. 북경 지도부는 자국의 남쪽에 통일된 강력한 베트남이 성립되어 그곳에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했다.
70년대 후반부터 중국은 캄보디아의 폴포트(Pol Pot) 정권을 이용, 베트남의 남서부를 공격했다. 78년에는 베트남 주재의 화교들이 박해를 받았다는 이유로 원조를 전면 중지하고 베트남에 파견되어있던 중국인 기술자들을 철퇴시켰다. 베트남은 78년에 중국을「주적」으로 인정하고, 같은 해 말에는 캄보디아령을 진격하였다. 폴포트 정권을 타도하고 친(親)베트남 정권(헹 삼린 정권)을 수립하였다.
하노이 지도부는 캄보디아 진격의 이유를 폴포트 정권에 저항하는 캄보디아 인민의 요청과 베트남의 자위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보다 단기적, 직접적인 베트남의 국익이었다. 중국과 캄보디아라는 양방면의 위협에 직면한 베트남은 이 사태를 시급히 해소할 양으로 작은 위협이었던 캄보디아를 배제시킨 것이다.
캄보디아와 국경이 접해있는 베트남 남부는 메콩델타 지역인 동남아시아 유수의 곡창지대이다. 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이며 통일직후 정계가 불안정한 남부를 방위하기 위하여 하노이 지도부는 중국의 영향하에 있는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을 쓰러뜨린 것이다.
하노이 지도부의 오산은 국제사회가 베트남의 행동을 이해한다고 생각한 것일 것이다. 폴포트 정권하에서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간 것은 전세계가 알고 있지만, 아무리 잔학한 정권이라도 외국이 무력으로 개입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혁명의 리더를 자처하는 하노이 지도부는, 캄보디아에 자국과 동일한 혁명체제를 만들고 혁명의 성과를 지키는 것은 국제적인 의무라며 베트남군을 10년간 캄보디아에 주둔시켰다. 국제사회의 룰보다도 혁명적인 도의를 우선시했으며 세계도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북경 지도부는 중국의 혁명노선에 순응하지 않은 채 친(親) 중국 성향의 폴포트 정권을 타도한 베트남에「징벌」공격을 가했다. 하노이 지도부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베트남은 재차 전시체제에 돌입하게 되었다. 중국과의 전쟁으로 베트남 주재의 화교 약 20만 명이 대거 중국으로 도피, 베트남은 화교계의 자본과 인재를 잃었다. 미국, 일본을 비롯한 외국은 캄보디아 문제와 다음에 기술할 "보트피플"문제를 이유로 베트남 원조를 중지했다.

 

국가계획경제체제의 파탄과 난민의 발생
내정을 살펴보면 북베트남의 국가계획경제체제를 남부에 밀어붙인 것이 파탄을 초래했다. 남부에서는 반혁명세력의 진압, 자본가ㆍ지주의 자산몰수, 상공업의 국영화, 농민 합작사로 통합하는 등 사회주의 개조정책이 강행되었다. 구 남베트남 정권의 관계자나「반혁명」으로 비춰진 사람들을 초법규적으로 강압하여 개조캠프라고 불리는 수용소에 장기간 구속시켰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나 생활수단을 빼앗긴 사람들은 배를 타고 비합법적으로 국외로 탈출했다. 그 수가 최종적으로 15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베트남 당국은 탈출희망자에게 조직적으로 금품을 압수하며 탈출을 묵인했다. 보트피플의 유출로 베트남은 경제부흥에 유용한 자본과 경영지식을 지닌 인재를 잃고 국제사회로부터의 비난이 넘쳤다.
구 북베트남에서 국영기업은 적자를 내도 국가예산으로 보전되었으며, 국가예산은 사회주의국가의 원조로 유지되었다. 국가는 원조물자를 배급하고 평등한 임금제도를 만들어 국민을 전쟁에 동원시켰다. 이 시스템은 전후의 남부에도 기계적으로 적용되었으나 채산을 도외시한 경영은 국가예산의 파탄을 불러일으켰으며, 획일적인 임금제도는 노동자의 근로의욕을 저하시켰다.
하노이 지도부는 사회주의진영의 전위로서 미국제국주의와 싸우는 베트남을 세계 인민들이 지원하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전후에도 질질 끌어 외국의 원조에 의존한 국가계획경제체제를 10년이나 지속한 것도 커다란 오산이었다. 그 결과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에는「북폭(北爆)시대가 더 나았다」라고 할 정도의 경제곤란에 봉착했다. 이 시절의 고통스런 경험은 현재도 베트남 사람들의 사고나 행동양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
하노이 지도부는 무력으로 남부의 병합을 서두르고 남부의 사회주의 개조를 강제적으로 추진하려 해, 국가를 국제적인 고립과 경제파탄으로 몰아 넣었다. 베트남의 통일은 그러한 타이밍과 수단을 그르쳤던 것이다.

 

도이머이 노선의 성과와 한계
86년 12월에 공표된 도이머이 노선은 앞서 기술한 것과 같은 곤란으로부터 탈각을 요구하던 민생의 절실한 요구에서 생겨났다. 도이머이는 민주화와 공개화, 대외개방, 시장경제의 도입을 골자로 하고 있다. 경제발전에 필요한 평화적인 국제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하노이 지도부는 우선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목표로 하고, 캄보디아 문제의 대화에 의한 해결을 추진했다. 국민에게는 대폭적인 경제활동의 자유를 인정하고 외국투자법을 개정해 외자 도입에 힘썼다.
91년의 소련붕괴는 베트남 공산당 내부에도 격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소련ㆍ동구권의 민주화를 지지한 당 간부들이 실각했다. 민주화는 도이머이의 골자 중 하나였으나, 공산당은 인민의 이익대표라는 방침이기 때문에 하노이 지도부는 당의 지도를 철저하게 하는 것이야말로「사회주의적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소련연방의 정변이 베트남에는 파급되지 않은 채, 일당체제하의 시장경제노선은 일정의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소련 붕괴후의 베트남 공산당은 지도 이념이었던「마르크스ㆍ레닌주의」에「호치민 사상」을 추가해 사회주의보다 민족주의를 어필, 사회주의진영의 일원이라기 보다 아시아 태평양공동체의 일원인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베트남의 경제는「사회주의지향 시장경제」로 여겨지며, 당 간부 중에는 사회주의 실현에는 200년이 걸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스스로 만든 신화의 재구성
2001년 공산당 제9회 대회에서는「전민족 대단결노선」을 내세웠다. 이것은 전체 아시아 그룹, 종교, 계급, 계층, 경제 섹터를 포섭해 남녀, 세대, 지역의 구별 없이 당원과 비당원, 현역과 퇴직자, 국내ㆍ국외주재자의 구별 없이「베트남민족 대가족」의 단결을 도모하는 노선이었다. 올해 열린 제10회 당대회에서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위인 동시에 전 베트남민족의 전위이며 전민족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고 인정 받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도이머이 이후의 대외개방과 시장경제에서 국민의 계층분화가 진행되어 이익이나 가치관이 다양화된 현실이 있다. 일당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하노이 지도부는 국민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과 국교를 회복하고 일찍이「미국 산하의 군사동맹」이라고 비난 했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에 가입하고,「자본주의적 세계화의 도구」라고 간주하던 세계무역기관(WTO)에도 가입하는 전환은, 사회주의혁명의 리더라는 스스로 만들어 낸 신화를 고쳐 쓰는 작업과 다름없다. 선행하는 현실에 맞춰 신화를 조금씩 수정하는 작업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수정의 결과 어떠한 베트남이 완성되더라도 일본인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베트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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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 아리(中野亞里)

 

와세다대학, 고쿠가쿠인(國學院)대학,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학 외국어학교 등에서 비상근 강사로 재직 중. 법학박사. 전문 분야는 현대 베트남의 정치와 외교. 주요 저서로는『베트남 – 공업화ㆍ근대화와 사람들의 생활』,『현대 베트남의 정치와 외교 – 국제사회로의 참여의 길』, 공동 저서로는『현대 아시아의 통치와 공생』,『액세스 지역 연구Ⅰ』, 편저로는『베트남 전쟁의「전후」』, 나카가와 아키코라는 필명으로 번역한 타인 튄 저서의『베트남 혁명의 내막』,『베트남 혁명의 본 모습』 등이 있다.

 

遠近(wochi kochi) 제14호(Dec.'06/Jan.'07)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