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부터 기획시리즈「일본의 거기, 그 사람」을 새롭게 연재합니다.
일본 체재 경험이 있는 한국의 각계 인사들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일본의 장소가 어디인지, 또는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일본인이 누구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각 분야에서 활약 중인 저명 인사들이 직접 겪은 일본 경험담은 다양한 각도에서 일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과 애독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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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빚, 도쿄 할머니

 

글 : 김 복 기 (「art in culture 」발행인 겸 편집인,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겸임교수)

 

김복기 氏
1999년 10월 초순, 시간은 자정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나는 도쿄의 야마노테센(山手線) 전철에 몸을 실었다. 얼마쯤이나 지났을까. 싸늘한 가을 바람이 내 얼굴을 때렸다. 술이 취해 졸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전철 문이 열려 있었고, "우에노 에키(上野), 우에노 에키"라는 장내방송이 내 귓전에 앉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쏜살 같이 여행가방을 끌고 전철 문을 빠져 나왔다. '휴~' 가와구치(川口)의 H선생 댁으로 가려면 우에노에서 전차를 바꿔 타야 하는데, 하마터면 역을 지나칠 뻔한 것이다.

 

전차는 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밤공기를 가르는 전차는 서늘한 바람을 내뿜었다. 가벼운 한기가 속살까지 파고들었다. 왠지 한쪽 손이 허전했다.
 '어? 어? ... 가방! 내 가방!'
서류가방이 없다. 나는 반사적으로 전차 꼬리를 쫓아 플랫폼을 달려 나갔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전차는 풀숲을 잽싸게 헤집고 들어가는 뱀의 행적처럼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곧 바로 역무원에게 뛰어갔다. 서류가방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을 하나하나 기억해냈다. 여권, 항공권, 취재수첩, 일본 연락처, 명함…. 천만다행으로 지갑은 몸에 지니고 있었다. 역무원은 신속하게 방금 떠난 전차가 경유하는 역마다 비상연락을 띄웠다. 잠시 후, 전차 안에는 그런 서류 가방이 없다는 답신이 속속 들어왔다. 역무원은 “요즘 우에노 부근에 동남아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와 도난 사고가 부쩍 늘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가방은 그렇게 전차 속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날 도쿄 이타바시(板橋)구립미술관에서 초청 강연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미술관은 개관 20주년 기념 전람회에 곁들여〈오늘의 한국미술 동향-미술 저널리스트에게 듣는다〉라는 주제 강연을 마련, 나를 초청했다. 나로서는 참으로 영광스런 자리였지만, 그때 나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망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내 생애 최대의 변신과 도전, 5개월 만에 art 창간호를 발간하고 바로 며칠 뒤, 나는 풀코스를 완주한 마라토너처럼 온 에너지를 소진할 대로 소진한 상태에서 도쿄로 건너간 것이었다.

 

강연은 성황리에 마쳤다.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는 기쁨도 컸다. 재일 한국인 화가 곽덕준(郭德俊), 한일 심포지엄이나 강연에서 수차례 통역 호흡을 맞춘 오랜 친구 후루가와 미카(古川美佳), 막걸리 같이 텁텁한 성품의 한국통 우에다 유조(上田雄三, 갤러리Q 대표), 오자키 마사토(尾崎眞人, 이다바시 미술관 학예과장, 현재 오사카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미술평론가 다니 아라타(谷新, 미술평론가, 우츠노미야(宇都宮)미술관 관장), 그리고 멀리 지역에서 온 젊은 학예원들…. 당연히 우리는 뒤풀이에서 뭉쳤다. 나는 이들과 미술 이야기로 그동안 쌓인 긴장과 피로를 씻어내고 있었다. 결국 나는 2차까지 술자리를 옮기는 강행군을 펼쳤다.

 

11시를 넘기고, 우리 일행은 전철역에서 헤어졌다. 이 무렵부터 기억의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나는 극도의 피로와 취기에 절어 있었다. 나는 외국 땅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자주 일본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내 동네처럼 한 순간 긴장을 완전히 풀어놓고만 것이다. 나는 전차 안에서 서류가방을 가슴에 안고 있었던 희미한 기억을 불러냈다. 외국여행에서 처음 겪는 '사고'의 책임은 전적으로 내탓이었다. 후회막금이었지만 사후약방문이었다. 나는 깊은 자괴감에 자신의 속을 할퀴며 휘집으며 우에노의 깊고 긴 밤을 헤매고 있었다.

 

그 이튿날 H선생 댁에 들어갔다. 곧 바로 나는 심한 몸살을 앓았다. 가방 분실의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는지 꼬박 이틀을 아예 꼼짝없이 드러눕고 말았다. 그러나 서울 상황이 궁금하여 나는 귀국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권과 항공권부터 발급 받아야 했다. 재발급 신청 때는 H선생 사모님께서 영사관까지 동행해 주었다. 그 이튿날 여권을 받는 날은 혼자였다. “조심하십시오!”  H선생 부부의 걱정 어린 눈길을 받으며 나는 문을 나섰다. 약 기운 때문에 몸이 어질어질했다.

영사관에서 임시 여행증명서를 받아들고, 나는 유라쿠쵸(有樂町)의 대한항공 사무실로 이동했다. 택시 안에서 몇 번이고 여행증명서를 확인하고 챙기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택시에서 내려 지척의 대한항공 카운터에서 발권 수속을 밝던 중, 지갑을 꺼내려 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지갑이, 지갑이 없다. 돈 지갑이...아아~~.  앞이 캄캄했다. 얼굴은 창호지 빛이었으리라. 여직원 앞에서 잠시 이리저리 허둥대다가 일단 대한항공을 빠져나왔다. "으~으~으~" 미친 사람처럼 나는 길거리를 헤매며 신음하고 있었다. 막막한 심정을 토해내는 울부짖음이었다.  ‘오~ 하느님! ’ 나는 두 손을 모았다.  ‘또 잃어버렸어...이런 바보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나는 제 머리카락을 연신 쥐어뜯었다.

 

택시 요금을 지불했으니, 나는 불과 2, 30미터 사이의 길거리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결국 경찰서로 발길을 옮겼다. 치요다(千代田)경찰서 습득물 접수센터로 올라갔다. 2층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아비규환 지옥에서 빠져나와 천당을 보고 있었다. 내 지갑이 저 먼 발치의 여자 경찰 손에 잡혀 있지 않은가. 접수창구에서 그녀는 지갑을 뒤적이며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반지갑의 터진 옆구리 사이로 두툼한 지폐 뭉치가 삐져나왔다. 그래, 내 지갑이야! 나는 지갑 앞으로 달려가 다짜고짜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지갑은 이렇게 쉽게 되찾았다. 천우신조였다. 대로변 옆 차도에 떨어진 지갑을 어느 일본 여성이 주워 경찰서에 맡겼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지갑을 찾았지만 경찰서를 바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경찰이 내놓은 유실법 관련 문서를 읽고서야 나는 자세한 사연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요지는 습득자에게 유실물 가격의 5%~20%까지 보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규정이었다. 물론 보상금의 지불 여부는 전적으로 습득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했다. 결국 습득자와 직접 대면하는 절차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산 넘어 산이다. 다음 날 아침 출국마저 불투명해졌다.

 

여자 경찰은 경찰서를 빠져나와 인근의 한 극장 앞으로 나를 안내했다.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극장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그 인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키가 작은 할머니 앞에 발길을 멈췄다. 내 지갑을 습득한 분이었다. 나의 인사를 가로막고 여자 경찰은 할머니와 사무 처리부터 시작했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 "습득자가 보상금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경찰은 나에게 지갑을 완전히 건네주었다. "그래도..." 나는 쭈빚쭈빚하며 이 큰 은혜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주 짧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을 여셨다. "조심하세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60대 후반쯤의 나이로 보였지만, 허리가 꼿꼿했고, 화장기 없는 피부는 맑고 밝았다. "예.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의 서툰 감사의 표시 중에 할머니는 입장객들에 떠밀려 극장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할머니와 헤어지고 말았다. 나는 경찰이 전해준 할머니의 연락처를 수첩에 받아 적었다. 유난히 찬란한 석양빛을 받으며 나는 무사히 가와구치로 되돌아왔다.

 

H선생 부부도 모르는 지갑 분실의 사연을 안고 나는 귀국했다. 그리고 또 다시 나는 긴박한 '잡지와의 전쟁'을 치러내야 했다. 할머니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겠다는 다짐은 하루하루 밀려 나갔고, 결국 연락처를 메모해 둔 수첩마저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로부터 6년 동안, 나는 배은망덕의 나락에 갇혀 있었다. 

 

나는 이 글의 원고 청탁을 받고, 잃어버린 내 지갑을 찾아준 도쿄의 할머니 찾기로 마음먹었다. 오랜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고 털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옛 서류 뭉치를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원고 마감을 일주일이나 넘기고, 나는 다행히 그 때의 수첩을 찾을 수 있었다.
고 사치코(鄕幸子). 아카바네(赤羽) 3-10-5.
도쿄의 아름다운 할머니! 잃어버린 지갑을 돌려받은 한국의 젊은이입니다. 이젠 할머니의 부드러운 음성과 단아한 용모도 기억에 희미해졌습니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빚을 어찌 짧은 입놀림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만, 할머니의 기억 속에는 정직한 마음의 일본이, 따뜻한 일본인이 늘 자리하고 있습니다. 흐뭇한 추억입니다. 너무나 뒤늦었지만 할머니께 감사의 편지를 올리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