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경민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2005년 여름 한 달은 일본대학에 가서 일본어로 초청강의를 하게 된다. 미국에서 공부를 한 내가 일본어로 강의를 할 수 있게 된 계기는 1992년 일본국제교류기금 초청으로 일본에서 연구활동을 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1992년 4월 일본 릿꾜대학으로 연구차 떠나면서 연구계약이 만료되는 1993년 2월까지 10개월 동안 일본어로 강연을 하고 돌아오겠다는 당찬 목표를 세웠다. ‘오하이오 고자이마스’ 정도의 일본어 밖에 모르던 차에 일주일에 두 번 오는 일본어 가정교사와 함께 <일본의 안전보장>이라는 전문서적을 내놓고 1시간 반씩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니 처음에는 한 페이지의 3분의 1도 진도가 나가지 않을 만큼 막막했던 기억이 새롭다. 가타가나도 모르는 아이들을 일본어 소학교에 입학시켜 놓고 겪었던 언어와 문화의 갈등은 지금이니까 추억이지 그 때는 아이들이 안쓰럽기 그지 없었다.


지금은 미국의 대학 4학년생인 큰 아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한 학기를 정신없이 보내고 2학기가 시작되기 전 날 밤, 통곡을 하며 “학교에 안가겠다, 내가 어떻게 학교에서 생활하는 줄 아느냐”며 아비를 원망할 때 연구가 무엇인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아이한테 “지금은 네가 어려울지 모르나 너를 데려 온 이유는 초등학교 5, 6학년 때 어느 외국이든 정규교육과정을 1년 정도 이수하면 그 나라 언어를 평생토록 간직할 수 있다, 네가 크고 나면 언젠가 고맙다는 말을 할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아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설득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빙그레 웃으며 고맙다는 소리를 듣는다.

 

릿꾜대학 졸업생들로 구성된 레이디즈 클럽의 자원 봉사자들 5명이 우리 가족에게 매달려 일본어를 가르쳐 준 덕택에 난 무사히(?) 돌아오기 전 30여명의 청중들을 모아 놓고 일본어로 강연을 했고 재작년에는 아사히 홀에서 700명의 일본인 청중 앞에서 서투른 일본어지만 4시간 동안 일본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호텔로 돌아와 뻗어 버렸지만 말이다.

 

일본국제교류기금 초청의 10개월은 일본어만 건진 게 아니다. 그 때 연구한 성과가 한국에서 <일본이 일어선다>라는 책으로 발간되어 1만부가 팔리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일본의 덕간서점(德間書店)이 번역해 일본에서도 1만부가 팔리는 행운을 맛 보았다. 아는 이 한 사람 없는 생면부지의 일본에서 이제는 가까운 친구 여럿 만들어 진 것도 그 때 그 기회가 없었더라면 일본은 나에게 아직 멀리 있는 이웃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일본의 군사 잠재력이 대단히 강하다는 쓴 소리를 마다 않고, 학문 활동의 자유를 관용스럽게 인정해 준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진정한 이웃 만들기에 더욱 노력해 줄 것을 바라 마지 않는다. 그래야 상호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