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찬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서울시대안교육센터 전문연구위원)

 

한국에서 지방자치가 실시된 지 15년이 되었다. 중앙정부의 민주화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시스템의 혁신였지만, 자치의 경험이 없었던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실시는 수많은 물의와 우여곡절을 수반해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피할 수 없는 학습의 과정이라고 본다. 스스로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의 동네나 도시를 주민들의 생각과 힘으로 경영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그런 질문을 가지고 씨름해 왔고, 그러한 맥락에서 일본의 마을만들기(まちづくり)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 동안 현장 연구와 함께 여러 책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한 권으로 이시재 교수가 다른 학자들과 함께 펴낸「일본의 도시사회」(서울대출판부. 2001)를 꼽을 수 있다.

 

무려 550쪽이나 되는 이 방대한 책에서 다루는 대상이나 주제를 보면 대단히 폭 넓게 걸쳐 있다. 크게 나누어 초나이카이(町內會), 사회 교육, 혁신자치체, 새로운 사회 운동의 네 영역으로 나누어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 하나 하나가 일본의 도시 사회를 논하는데 핵심적인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가와사키시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위의 개념들에 대해 매우 상세한 배경 설명을 곁들이고 있어서, 일본의 현대사회가 변모해온 과정을 개괄적으로 이해하는데도 유용한 안내서가 되고 있다.

 

가와사키시는 혁신자치체가 가장 늦게 까지 유지된 지자체로서 그 안에 다양한 힘과 지향들이 중층적으로 맞물리면서 사회를 변화시켜가는 역동성을 보여왔다. 우선 가장 기초적인 지역 공동체의 기반인 초나이카이는 일본 어느 지역에나 조직되어 있는 주민 자치 조직으로서 복지에서 쓰레기 처리 그리고 문화행사에 이르기까지 공동 생활을 스스로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굳이 견준다면 한국의 반상회에 해당하는 것인데, 한국보다 한결 더 잘 조직화되어 있다. 초나이카이의 그러한 저력은 흔히 일본의 공동체(村)적 문화에 결부시켜 설명되기도 하지만, 이 연구에서는 사회 통합의 기능적인 합리성에 더 주목한다.

 

가와사키시의 경우 고도 경제 성장과 함께 도시가 팽창하면서 바깥에서 이주해온 인구가 점점 늘어나게 되자 초나이카이의 통합력은 점점 떨어지게 되었고, 새롭게 직면하게 된 여러 가지 도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악화되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혁신자치체가 성립한다. 혁신자치체는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정치 상황으로서, 자민당의 장기 집권 체제 속에서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혁신 정당이 선거 혁명을 통해 지자체의 권력을 잡아 이룩한 통치 체제이다. 거기에서 핵심 쟁점이 된 것은 대도시의 공해 문제 등 생활 환경을 급속히 악화시키는 주범으로서 기업을 견제하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서 단순한 반공해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했고 궁극적으로 기업과 밀착된 보수 권력을 교체하는 것이 목표로 떠올랐다. 가와사키시의 경우 1971년 그 혁신이 이뤄져 1993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단체장은 바뀌었지만, 지방의회는 여전히 토착 자영업자 층에 기반을 둔 보수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체장이 손을 잡은 것이 바로 공무원 노조였다. 이 역시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감이 잡히지 않지만, 일본의 공무원 노조는 공산당 계열과 사회당 계열로 양대 산맥을 이루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실행하는 정책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제안해왔다.「자치연」이라는 정기 간행물은 전국의 공무원들이 다양한 정책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미디어로서 자리잡고 있다. 가와사키시 시장은 그러한 공무원들과의 연계를 통해 시민들과의 접점을 마련하면서 지지 기반을 재생산해 나갔다.

 

그 구체적인 전략은 사회교육이었다. 애당초 공무원의 주도로 시작된 사회 교육은 시민들 스스로 학습 활동을 조직하는 ‘사회교육운동’으로 진화되어 갔다. 시민관이라는 공간에서 발전되어간 그 프로그램을 통해 기존의 지역사회의 공공 영역에 통합되지 못했던 신주민과 주부들 (일본의 초나이카이나 자치회는 한국의 반상회와 달리 남성 노인들이 중심이 되어 있다)이 생활상의 제반 문제와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시민적 주체로 성장해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공무원들의 하향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성향과 갈등 관계에 빠지기도 했는데, 이 연구에서는 그러한 국면들도 놓치지 않고 있다.

 

결국 가와사키시의 지자체 운용이 혁신성을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새로운 삶과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시민들의 운동 에너지가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현존하는 상황을 넘어서 ‘대안’ (일본에서는 이 말을 거의 쓰지 않고 그냥 영어로 ‘얼터너티브’라고 부른다)을 모색하는 힘의 결집이 이뤄진 것이다. 그 지향점을 보면 직접 참가, 개체의 자립의 전제로 한 사회적 공동성의 추구, 생활의 관점에서 사회 변혁의 촉구라는 세 가치 차원으로 압축될 수 있다. 그러한 비전은 생활 클럽이나 워커즈 컬렉티브 운동, 그리고 그러한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주부들의 힘을 정치 조직화하여 독자적으로 지방 의회에 진출하는 대리인 운동 등으로 구현되었다. 또한 그러한 운동의 자장 속에서 볼런티어 운동의 지평을 넓혀 자발적이고 이타적인 봉사 활동뿐만 아니라 지역 연대성을 담보하고 ‘자기 변혁’이라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기에 이른다.

 

▲ 가와사키 볼런티어센터 Web-site
그러나 그러한 꿈이 제대로 이뤄지지는 못했다. 볼런티어 운동의 예를 들면 거기에는 두 가지 장애가 있었다. 하나는 ‘사회복지협의회’등의 조직을 통해 지역의 복지에 오랫동안 관여해온 전통적인 구세력의 견제였다. ‘가와사키 볼런티어센터’의 설립 과정에서 그 집단과 시민운동 그룹 사이의 갈등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또 하나의 장애는 행정이었다. 혁신자치체는 시민들의 운동 에너지를 혁신성을 재생산하는 원천으로 삼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정의 기틀이 부과하는 범위 내에서였다. 즉 민이 관 보다 우위에 서는 참여를 보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혁신자치체의 기반인 노동운동이 갖는 패러다임이 시민운동의 패러다임과 다른 데서 발생하는 긴장도 일정한 범위 내에서 ‘시민 끌어안기’에 머물게 만들었다.

 

이 책이 갖는 의의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우선 일본 연구의 격을 크게 높였다는 점이다. 한국은 일본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고 있지만 막상 어느 구체적인 분야로 들어가면 매우 편파적이고 피상적인 지식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일본의 도시 연구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은 한 도시를 3년간의 집중적인 현장 조사를 통해 깊이 파고들면서 여러 주제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다시 일관된 맥락 속에서 통합해내고 있다.

 

세계화가 급진전되면서 문화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다른 사회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사회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전형(stereotype)으로 단순화되기가 쉽다. 특히 일본은 몇 가지 개념으로 간단히 요약되기가 일쑤다. 그러나 그 사회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여러 힘들이 복잡하게 얽혀 길항 관계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일본의 도시사회」는 안이한 문화결정론을 극복하면서 지금까지 한국의 일본 연구에서 제대로 조망되지 못했던 비주류 세력들이 어떻게 새로운 시민사회를 만들어가는지, 그리고 그 공간에서 형성되는 보편적 의미들을 통해 한국사회의 자화상을 되짚어볼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지를 세밀하게 탐색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활성화되기 시작한 지역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