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제교류기금 공모사업으로 진행되는 <JF 펠로십 프로그램>에 참가한 분들의 진솔한 일본체류이야기와 일본연구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민병걸
서울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교수

 

우키요에가 현대 일본그래픽디자인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계획으로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일본연구펠로우십에 선정되어 도쿄로 떠난 것은 지난 해 7월 중순이었다.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카시와기 히로시 선생님의 조언을 받아가며, 에도시대의 우키요에에 숨겨져있는 디자인으로서의 매력과 현대 일본 그래픽디자인으로 이어지는  일본적 조형에 몰입하며 지낸 1년이었다.


1년 동안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불운이라면, 쉽게 접할 수 없는 귀한 자료들로 가득차 있던 무사시노 미술대학 도서관이, 내가 도쿄에 도착하여 얼마 지나지않아 확장을 위한 공사를 시작했고, 모든 자료들의 열람과 대출이 중단되었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 바로 전에야 공사가 끝났다는 것이다. 보물같은 자료들을 코앞에 두고 다른 외부의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야 했던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일본의 공공도서관이 수많은 전문 분야의 자료를 어떻게 유지하고 운영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더욱 많은 전문가들과 만날 수 있었고 도서관 자료에서 얻지 못하는 많은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우키요에의 관련 자료로 넘쳐 나는 일본에서 진행한 연구라 하더라도, 서툰 일본어로 1년 동안 얻어낼 수 있는 성과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연구기회를 통해 일본 디자인의 큰 흐름에 대해 어느 정도 맥락을 읽어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해 향후에도 관련된 연구를 지속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그러나 나보다도 더 많은 경험과 관계를 얻은 것은 아내와 딸이다.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낯선 도쿄에서 1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설레임보다는 긴장감이 역력했던 둘의 얼굴이 떠오른다. 둘 다 그리 사회성이 좋은 성격은 아니어서 주변 사람들과 가까워지는데 시간이 걸리는 성격이다 보니 1년이라는 기간을 어떻게 보내게 될지 크게 걱정되었다.

 

처음 맞닥뜨린 문제는 딸아이의 전학이었다. “이지메”라는 일본어가 그대로 한국에서도 쓰이고 있던 탓인지, 나와 아내는 무의식적으로 일본의 학교에 대한 경계심을 품고 있던 듯하다. 초등학교(소학교)6학년이었던 딸아이를 신주쿠의 한국학교에 보내야 할지 일본학교에 보내야 할지 여러 날 고민했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딸아이에게 직접 의견을 물었더니, 의외로 딸아이는 일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녀보고 싶다고 했다. 딸의 그런 자신감과 호기심어린 태도에 놀라기도 했고 기특하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 후, 전학에 앞서 담임선생님과의 사전면담을 다녀온 뒤 상황은 돌변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고 난 뒤, 아이는 갑자기 겁을 먹고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는 듯했다. 일본에서 일본의 학교를 다니며 얻을 수 있는 장점 등을 설명해 설득하고,  간신히 한번 해보겠다는 모깃소리 만한 대답을 얻어냈다.
첫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딸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에게 인계한 후 돌아오면서도 내 결정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1년 이라는 정해진 기간을 말도 통하지 않는 친구들 가운데서 마음의 상처만 얻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첫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의 얼굴이 너무 밝았다. 게다가 두 명의 친구가 집앞까지 함께 바래다 주기까지 하였다. 걱정이 앞서 집 밖으로 나가 딸의 하교를 기다리고 있는데, 서로 말이 통할 리도 없는 아이들이 서로 낄낄거리고 웃어가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둘째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아이의 얼굴은 어제의 그 새파랗게 질려있던 얼굴과는 전혀 다른, 기대에 찬 밝은 얼굴이었다. 그 후로 단 하루도 학교에 가기 싫다는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나중에 다른 부모님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되었다. 교장선생님이 딸아이의 등교 전 날, 전교생에게 한국어 인사말을 가르쳤다고 한다. 한국에서 온 전학생은 일본어를 전혀 모른다. 일본어를 모르기도 하지만, 아마도 긴장해서 그 아이가 먼저 인사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가 먼저 “안녕”이라는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다면 그 아이는 곧 친구가 될 것이다. 라며 학생들과 함께 한국어 인사말을 연습했다는 것이다.  교장 선생님은 아주 현명한 방법을 통해, 자신의 아이들에게 언어적으로, 정서적으로 약자였던 새로운 전학생에 대한 배려를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아이들의 만남은, 그 또래에서 가끔 생겨나는 작은 갈등 정도는 쉽게 극복할 수 있었고, 서울로 돌아온 이후에도 우편으로, 이메일로 그 인연은 지속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내는 20년 나이차이의 친구를 얻었다. 아내가 구민회관에서 자원봉사로 외국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던,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였던 후지모토 선생님의 일본어 수업에 나가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일본어가 초보적인 수준을 넘어섰을 때부터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형식을 잊고 서로의 집을 오가며 요리를 만들어가며 서로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로 세대를 넘어서는 친구로 바뀌었다. 친구라기보다는 딸과 어머니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서로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깊은 이해는, 낯선 곳에서의 어색함으로 위축되어 있던 아내의 생활을 활기찬 호기심으로 채워주기 시작했다. 서울로 떠나는 날 이른 아침,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후지모토 선생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이 직접 만든 김밥과 빵을 내밀었다. 공항에 가서 아침으로 먹으라는 말과 함께 눈물을 터트렸고 집사람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렇듯 지난 1년 도쿄에서 딸과 아내가 이러한 인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동안 이런 저런 명확하지 않은 이유들로 쌓여오던 편견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가족들에게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발견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한 해였다.

 


<<민병걸 교수 약력>>
무사시노 미술대학 대학원 졸업
서울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중.

이 밖에 (주)안그라픽스(Ahn Graphics) 디자이너, 한국시각정보디자이너협회 이사,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사무총장, 디자이너그룹 '진달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