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제교류기금 공모사업으로 진행되는 <JF 펠로십 프로그램>에 참가한 분들의 진솔한 일본체류이야기와 일본연구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도쿄를 걸으며 맛본 행복을 돌아보며

 


조용래
국민일보 논설위원

 

2008년 3월 1일. 도쿄의 공기는 각별했다. 일본에서 15년만의 장기체류가 시작된 탓인지 모든 게 새로웠다. 그간 나름 일본을 연구하고 관심을 키워왔던 터라 일본 출장이 잦은 편이었지만 10개월간의 장기체류는 낯설면서도 각별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에서는 2003년 10월부터 ‘자동차 질소산화물(NOx)·미립자물질(PM)법’이 시행되면서 수도권을 비롯한 276개 지자체에 한해 신차 등록 후 9년 이상 된 트럭·버스·디젤차량이 가동할 수 없게 된 덕분에 도심 공기가 많이 맑아졌다고 했다. 도쿄의 공기는 확실히 과거 유학시절보다 좋아져 있었다.

 

 

▶단신부임이 시작되다

그런데 나의 도쿄행은 단신부임이었다. 그해 1월 막 취업을 한 큰애도 그렇고, 어렵사리 대학입시에 성공한 둘째 애는 엉뚱하게도 재수를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도쿄행은 혼자 몫이 됐다. 불안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어쩌겠나.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편이 나을 테니.

 

게이오대학 상학부가 있는 미타(三田) 캠퍼스에서 비교적 가까운 신주쿠선의 아케보노바시(曙橋)역 부근에 숙소를 얻었다.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지만 집에서 미타의 연구실까지는 40분이면 충분했다. 연구주제인 고령자 고령문제와 관련해 자료 확보를 위해 자주 들러야 했던 네리마쿠(練馬区) 가미샤쿠지이(上石神井) 소재의 독립행정법인 노동정책연구·연수기구(JILPT)와 미나토쿠(港区) 타케시바(竹芝)에 있는 고령·장애자고용지원기구(JEED)와의 연계도 원활했다. 서울에서도 출근길이 한 시간 정도였으니 도쿄에서 마주하게 된 연구와 주거 환경의 조합은 나무랄 데가 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50줄에 들어선 남자가 혼자 지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부담이었다. 소프트랜딩을 위해서는 시간관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동시에 연구 이외에 재미를 붙여야 할 대상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선 시간관리 차원에서 주중에는 학교와 연구소에서 보내고 토요일엔 도쿄 부근 산행, 일요일엔 유학시절부터 섬기던 교회(日本基督教団百人町教会)에 나가 오랜 교회 동료들을 만나는 것으로 정했다.

 

 

▶다카오산만으로 만족할까

 

 

 

 

 

 

 

 

 

 

 

 

 

 

 

 

 

 

 

 

 

 

<2008년 7월 마츠모토성 앞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행보는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지만 토요일 산행은 참 쉽지 않았다. 비가 많은 도쿄에서의 토요일 산행은 비 때문에 자주 무산되곤 했다. 이뿐 아니라 도쿄는 서울과 달리 등산까지는 아니라도 트래킹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접근하려면 적어도 전철로 1시간 이상 이동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주말 산행계획을 별도로 준비하지 않으면 매주 다카오산(高尾山)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집 앞 역에서 다카오산역으로 가는 직통노선이 있었기에 별 생각 없이 집을 나설 때는 그 선택뿐이었기 때문이다. 글쎄 10개월 동안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다카오산은 몇 번이나 올랐을까. 20번 이상 간 것 같다. 다카오산을 탓하자는 게 아니라 도쿄에서의 산행은 그만큼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렇게 시간관리가 시작되면서 도쿄의 체류는 조금씩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특히 5월 쯤 접어들고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포근해지면서 매일매일 산보하는 습관도 덩달아 따라붙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도쿄 탐방이라는 또 다른 체류 목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까지 이어졌던 일본 유학생활 동안 처음 첫 해만 분쿄쿠(文京区)의 도미사카(富坂)에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했을 뿐 이후론 주로 사이타마에서 거주했기에 사실상 도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그 때는 마음만 바빴다. 더구나 유학시절엔 학교와 집을 잇는 전철만 이용했고, 지하철 위의 도쿄에 대해서는 관심도 적었고 직접 체험해 볼 기회는 더더욱 많지 않았다.

 

 

▶걸어서 두 시간 걸려 학교에

그런저런 생각이 들면서 이번 기회에 도쿄를 걸어보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지도를 펼치고 우선 아케보노바시의 숙소에서 미타에 있는 학교 연구실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대강 방향만 잡고 야스쿠니도오리(靖国通り), 신주쿠도오리(新宿通り)를 가로질러 JR 시나노마치(信濃町)역을 거쳐 가이엔히가시도오리(外苑東通り)를 따라 걸었다. 아오야마(青山)를 지나 록폰기(六本木)를 더듬어 가면서부터는 도쿄타워가 방향타 역할을 했다.

 

 

 

 

 

 

 

 

 

 

 

 

 

 

 

 

 

<2008년 7월 오제에서>

이윽고 러시아 대사관을 오른쪽으로 싸고돌면서 사쿠라다도오리(桜田通り)로 접어들자 초행길이었지만 성공예감은 물론 만족감마저 느껴졌다. 사쿠라다도오리는 게이오대학 미타캠퍼스 동문(東門=옛날엔 ‘마보로시노몬·幻の門’이라고 불렀지만)에 면해 있어 매일처럼 오가며 확인하고 있었으니 안심감과 더불어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첫날은 두 시간이나 걸려 도쿄 도심 도보여행을 마쳤다. 이후 학교 연구실에서 귀가할 때도 종종 그 역순을 따라 걸었다. 시간은 점점 단축되면서 가을쯤 되자 1시간 15분 정도면 집에 도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도중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회수가 점점 더 늘어나기 때문에 걸리는 시간은 늘 2시간을 넘기기가 예사였다.

 

도심 걷기에 맛을 들이면서 두 발로 안 가는 곳이 없을 정도가 됐다. 여름철엔 햇살이 조금 느슨해질 무렵에 나서 초저녁 어둠이 내릴 때까지가 아주 좋았다. 가을엔 주로 진구큐조(神宮球場) 주변의 메이지코엔(明治公園), 진구가이엔(神宮外苑) 등을 찾았고 특히 이초나미키도오리(いちょう並木通り)를 오가면서 은행나무에 흠뻑 취하곤 했다.

 

도심을 걷는 맛이 이렇게 깊은 것인지는 처음 알게 되었다. 역사가 배어 있는 거리,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고민이 스며들어 있는 곳, 무엇보다 지금도 그 길을 지나는 일상들이 내뿜는 각양각색의 분위기는 여행객의 마음을 풍요롭게 했다. 쌓인 세월의 더께가 있고 이를 바라보는 이가 있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생동감은 아마도 지난 2008년 일본연구펠로십을 얻어 지냈던 시간 가운데 가장 의미 있고 본질적인 경험이 아닐까 싶다.

 

 

▶연구대상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일본연구에서 객관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에 직접 교감하면서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고민과 안타까움을 뒤집어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질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도쿄 도심을 걸으며 맛본 행복은 어쩌면 일본연구의 본질을 다시 한 번 곱씹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도쿄 도심을 걷겠다는 열린 마음은 이윽고 일본 지방도시, 시골마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 그곳의 진솔한 속살을 겪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옛 니코(日光) 가도나 고슈(甲州) 가도 등을 따라 걸어보는 맛은 그래서 더욱 새로웠다. 현재 나의 가장 당면한 연구주제인 고령자 고용문제 역시 연구대상 차원으로만 고령자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해당자 각 사람의 삶과 현실을 포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도쿄 도심에서 맛본 행복은 사물에 대한 나의 관심을 비롯해 나 자신의 연구 태도를 규정하는 데 앞으로도 매우 중요한 경험으로 작용할 것 같다.

 

 


조용래

국민일보 논설위원. 한국일본학회 산하 일본정경사회학회장(2009~2010) 역임.

2007~2008년도 JF 일본연구펠로십에 선발, 게이오대학(慶應義塾大学) 상학부 방문연구원.

게이오대학 대학원 경제학연구과 수학(1984~1993). 게이오대학 경제학박사.

저서로 ‘천황제 코드’(2009), 공저로 ‘시장인가 정부인가(2004)’ ‘都市と文明(1996)’ ‘자본주의사회를 보는 두 시각(199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