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제교류기금 공모사업으로 진행되는 <JF 펠로십 프로그램>에 참가한 분들의 진솔한 일본체류이야기와 일본연구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일본에서 샤쿠하치(尺八) 불다


 

 

김상조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제펜 파운데이션 일본 연구 펠로우 공모에 응모하면서도 연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선발된 뒤에도 이번 기회에 일본 여기 저기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만 가득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에도 이런 생각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불량 연구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신청한 통신사 연구 프로젝트는 나같은 불량 연구자에게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연구를 한답시고 통신사 길을 따라 여행을 하면 일본의 절경을 두루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마도를 통하여 일본에 입국한 조선의 통신사는 오사카까지는 배로 여행을 했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교토 앞까지도 강을 따라 가능한 한 배로 이동했다. 강이 깊은 곳은 노를 어서 갔지만 너무 낮아 배가 갈 수 없는 진 곳은 강 양안에서 사람들이 배를 끌기도 하였다. 교토에서부터 에도까지는 육로 여행이었다.

그런데 이 통신사 코스가 매우 아름다우며 특히 머물러 숙박을 했던 곳의 경치는 그야말로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절경들이다. 육로에서는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가 한정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일정한 거리마다 숙소가 있을 수 밖에 없지만 뱃길 여행을 할 때는 많은 날을 배 안에서 잠을 잤으며 상륙하여 머물렀던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렇게 드문드문 상륙하여 머물던 숙소의 경치가 천하 절경인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통신사가 머무는 숙소를 단순히 거리에 따라 정한 것이 아니라 경관이 좋은 곳을 찾아서 정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통신사의 여행길을 따라 다니면 일본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경관을 구경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곳에 머물면서 조선에서 온 통신사들도 그 아름다움에 찬탄을 아끼지 않고 글과 글씨를 남겼다. 한 예를 들면 1711년 통신사행의 종사관으로 갔던 李邦彦 통신사 일행이 머물던 도모노우라(鞱浦)의 숙소 福善寺日東第一形勝’이라는 글을 써 남겼으며, 1748년 통신사로 갔던 洪景海 對潮樓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동행했던 그의 아들 啓禧 현판에 글씨를 써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처럼 글과 글씨를 남긴 곳이 여기 한 곳이 아니다. 시즈오카 현의 淸見寺에는 조선 통신사가 남긴 글씨가 한 권의 도록을 꾸밀 만큼 많다. 게다가 숙소였던 곳에는 통신사 자료관까지 마련되어 있는 곳이 많다. 그밖에 통신사 행렬 코스는 아니지만 나의 프로젝트 과제를 위하여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의 자취를 찾아 芳洲庵에도 가보았다. 여행을 가면서 연구차 현지답사를 간다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연구라는 이름으로 일본 최고의 절경을 보고 다닌 것이다.

 

내가 1년을 머물렀던 천리시는 별로 크지 않은 시골 도시다. 그러나 그곳에 자리한 천리대학은 한국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엄청나게 보관되어 있으며 그 중에 일부는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국내에도 영인 소개되어 있다. 저 유명한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천리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뿐이 아니다. 천리참고관이라는 이름의 박물관에는 고려와 조선의 도자가도 엄청나게 많다. 아무리 잿밥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나도 그런 자료를 보는 것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게으르게나마 노력하였다.

또 천리대학에서 1년을 머물면서 나는 천리대 방악부에 들어가 샤쿠하치(尺八)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샤쿠하치는 일본의 대표적인 죽관악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대금이라고 소개를 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대금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죽관악기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금은 옆으로 부는 악기이고 샤쿠하치는 앞으로 부는 악기이다. 샤쿠하치라는 이름은 본래 악기의 길이가 한 자 여덟 치라는 데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전통 악기 중에서는 퉁소와 가장 비슷한 악기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대나무로 만들어서 부는 악기를 흔히 피리나 퉁소라는 이름을 가지고 말하지만 실상 우리 음악에서 피리나 퉁소는 그리 널리 쓰인 것이 아니다. 피리도 대금이나 단소에 비하면 그렇게 널리 연주되는 편이 아니지만 퉁소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북청사자놀이에서 쓰이는 음악 말고는 들을 수가 없다. 그런데 왜 퉁소라는 이름은 그렇게 널리 알려졌는지 좀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천리대는 천리교에서 세운 학교인데, 이 천리교의 교리는 70%神道, 30%는 불교 교리를 원용했다고 한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신도와 불교는 모두 일본의 전통적인 종교이다. 그래서인지 천리대에는 일본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관심이 많다. 학내 동아리 중에도 雅樂部邦樂部 일본 전통의 음악 동아리이다. 이중에서 아악부에서는 전통적인 아악을 연주한다. 아악부는 일본에서도 유명하여 일개 학내 동아리이지만 정기공연 때에는 티켓을 사서 들어가야 한다. 입장료도 만만치 않다. 또 드라마 같은 데에서 아악이 필요하면 천리대 아악부를 초빙하기도 한다. 반면에 방악부는 근래에 작곡된 일본 음악을 주로 연주한다. 나는 그중에서 방악부에 들어가 샤쿠하치를 불어 보았다.

우리의 대금도 그렇지만 샤쿠하치도 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은 악기다. 다행히 나는 잘 불지는 못하지만 대금을 가지고 논 경험이 있기 때문에 소리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금이나 퉁소나 샤쿠하치나 소리내는 원리는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디 음악이 소리내는 것으로 그치는가. 워낙 음악적 재능이 없는데다가 나이가 들수록 손가락을 놀리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내 재주 없음을 한탄했는지 모른다. 젊은 대학생들과 함께 연습을 하다가 혼자서 음이 틀려 연습이 멈추어지고, 그럴 때마다 얼굴을 붉히면서 사과를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떻든 이렇게 해서 나는 천리시에서 벌어지는 2010년 사쿠라 마쯔리에 천리대 방악부의 공연에 끼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내 실력으로 무대에 서는 것은 너무나도 뻔뻔한 짓이다. 무대에서 나는 그저 자신이 없는 부분은 악기를 입에 대고 부는 시늉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배우고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샤쿠하치의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이 깔려 있는 소리에 매료되었다. 음악에 문외한인지라 내가 느끼는 것이 얼마나 정확한지 모르지만 내가 느끼는 일본 전통음악의 주조적인 감정은 슬픔이다. 샤쿠하치를 들으면 그 깊이있는 소리가 사람의 심금을 깊숙한 곳까지 절절하게 울려준다. 지금도 나는 가끔 샤쿠하치 음악을 들으면서 그 때를 돌이켜본다. 그러면 나라분지를 에워싼 산과 그 안의 들판이 눈앞에 선하게 펼쳐진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게 다시 한번 그런 기회가 있을까. 없는 재주를 한탄하고, 나 혼자 틀려서 연습이 중단되어 젊은 아이들에게 멋쩍은 얼굴로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반복해서 하던 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