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제교류기금 공모사업으로 진행되는 <JF 펠로십 프로그램>에 참가한 분들의 진솔한 일본체류이야기와 일본연구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약국할머니의 따뜻함을 떠올리다

 

 

김도형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박사수료

 

200910, 추석연휴를 보낸 다음 주, 도쿄에 도착. 빵빵하게 부풀어있던 대형 캐리어와 소형 캐리어, 무거운 배낭이 무척 버겁게 느껴졌다. 설상가상, 나리타에서부터 잔뜩 흐려있던 날씨는, 임시거처로 예약해 놓은 세타가야구(世田谷区)의 어느 게스트하우스 근처에서부터 차가운 가을비를 쏟아냈다. 꽤나 번거롭고 피곤한 일본도착 첫날. 사실, 예정대로 도쿄대학 쪽에서 소개해 준 숙사(宿舍)에 무사히 들어갈 수만 있었다면 이리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유학비자니, 문화활동 비자니, 그게 그리도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여하튼 일본사람들 까다롭기는. 이런저런 불평이 비에 쫄딱 젖은 머리의 김과 함께 피어올랐다.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던 나에게 JF의 일본연구펠로우십 선정은 너무나 큰 행운이었다. 나의 관심분야인 메이지 일본의 지식인들을 살펴보고자 하면, 일본에서의 연구생활 및 자료 수집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의 박사논문이 구체화되는 데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시작된 일본에서의 생활은, 지도교수가 미리 알아봐주었던 오다이바(台場)의 숙사가 유학 비자를 가진 사람들만 그 자격이 된다는 이야기에 꼬이기 시작하면서,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것이 되었다.

거처에 여장을 풀고 지낸 지 3일 쯤 되었을까. 옆구리 쪽에서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잠들었다. 그리고 깨어난 토요일 아침. 어제 욱신거리던 옆구리에 발진이 생겼고, 동네의 병원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진단명은 대상포진. 과도한 스트레스나 피로로 면역력이 저하되면 발병할 수 있는 병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뿔싸, 전 날 요쓰야()에서 숙소까지 도쿄 시내를 둘러보겠다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 게 무리였구나. 자업자득. 그런데 문제는 병원비와 약값이었다. 건강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던 탓에 깜짝 놀랄 만한 병원비와 약값이 나온 것이다. JF의 체재비는 다음 주에 들어올 예정이고, 그 때 수중에 지닌 돈은 2만 엔 남짓. 병원비는 냈다지만, 별안간 처방전을 들고 찾아온 생면부지의 외국인에게 4만 엔이 넘는 비싼 약을 외상으로 내줄 약국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동네 약국들을 너 댓 군데 다녀보았지만, 당연히 모두 거절. 짜증과 스스로의 대책 없음에 대한 자책이 뒤섞인 심정으로 동네 상가골목을 헤매던 그때, 조그마한 약국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고장 난 자동문을 억지로 밀어 약국으로 들어가니, 구석에 웅크려 졸던 할머니 한 분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친절히 물어봐주는, 그러면서 허리가 굽어 잘 걷지도 못하는 몸을 일으켜 날씨가 추우니 이거부터 한 병 마시라며 갈근탕을 건네주던 그 손길에, 살짝 뭉클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약국에 들어온 이유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무려 몇 시간이 넘는 수다로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머니의 가족이야기로부터 동네이야기, 젊은 시절의 회고담, 심지어는 나의 도일(渡日)경위에서 연구테마 이야기까지. 알고 보니, 할머니는 어린 시절을 옛날 한국의 혼마치(本町通, 지금의 명동, 충무로)근처에서 보냈고, 학교도 그곳에서 다녔다. 군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부임으로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고, 여전히 곰방대, 지지미, 남대문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가끔씩 함께 군것질하던 언니 이야기에서 눈물짓던 할머니는, 결국 돈이 생기면 갚으라며 4만 엔이 넘는 약값을 선뜻 내어주셨던 것이다.

돈을 갚은 이후로도 나는 종종 약국에 들르곤 했다. 그렇게 갈 때마다 한 두 시간씩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진다며 할머니는 갈 때마다 갈근탕이나 영양제를 주셨고, 점심이라도 먹지 않은 날이면 앞의 식당에서 정식을 시켜주시기도 하였다. 언젠가 왜 나를 도와주었냐고 물어보자, 이렇게 답하셨다. ‘혹시라도 곤란한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내가 한 것처럼 남들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 한국에서 곤란에 처한 일본인을 만나는 일이 있으면, 내가 한 것처럼 도와주면 좋겠다.’

세타가야에서 두 달 정도를 보낸 후, 나는 도쿄대학 혼고(本鄕)캠퍼스 가까이에 위치한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일본의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또한 많은 만남과 지적 자극을 얻었다. 신세를 진 미타니 히로시(三谷博)교수와 그 세미나 학생들과의 교류로 연구에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고,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자료와 연구 성과를 수집했다. 마치 미로 같은 종합도서관 서고를 드나들며, 먼지 쌓인 메이지시대의 저술원본들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글의 의뢰를 계기로 일본생활을 되돌아보니, 의외로 많은 이야기 거리가 떠올랐다. JF의 지원은 물론이거니와, 그곳에서 만난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즐겁고도 충실한 1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은 일본에 건너가자마자 우연히 접하였던 저 약국할머니의 갈근탕이었다. 막연히 지니고 있던 타지생활에 대한 불안이나 조급함, 삐끗했던 시작으로 인한 선입관 따위가 그 갈근탕의 온기 속에 녹아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어디건, 어떤 상황이건 사람의 따뜻함만 있다면, 그다지 걱정할 것 없다는 그런 교과서적인 교훈의 실감(!)이라니. 잊고 싶지 않은 기억. 부디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