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F와 함께 한 사람들 (22)

 

 

 

 

 

“장혁주의 삶의 흔적을 찾아서

 

윤 미란

인하대학교 BK21 동아시아 한국학 박사후연구원(post-doctor)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를 두고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던 2010년 겨울, 일본국제교류기금 펠로십에 지원서류를 내고, 2011 2월 나는 사이타마현(埼玉県)으로 향했다. 나의 목적지는 히다카시(日高市) 다카오카(高岡) 1번지. 이곳은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 장혁주(張赫宙, 1905-1997) 1947년부터 그의 반평생을 살았던 곳이다. 그 이전부터 그 옛날 멸망한 고구려의 후예들이 건너와 세웠다고 하는 작은 마을 고마고(高麗鄕)로 익히 들어왔던 이 곳은 잔잔히 흐르는 고마가와(高麗川)와 고즈넉한 고마진자(高麗神社)를 간직하고 있다. 장혁주는 집 앞 고마가와를 바라보다 종종 고마진자를 방문하는 코스로 산책을 다니곤 했으리라 생각하며, 주소를 들고 물어 물어 도착한 다카오카(高岡) 1번지.

 

 

 

 

 

 

 

 

 

 

 

 

 

 

고마가와(高麗川)

 

 

 

 

 

 

 

 

 

 

 

 

 

 

 

 

 

 

                                                                        고마진자(高麗神社)

 

그러나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던 논문이 일제히 백지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장혁주의 삶의 흔적 같은 것을 보리라 기대하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지만, 텅 비어 있는 집터를 눈 앞에 두고 나의 논문 구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는 친일작가, 일본에서는 반도작가로 호명되던 장혁주의 문학을 왜 선택했던가. 아니 선택의 문제는 이미 운명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왜 선택했는가보다는 어떻게 볼 것인가가 더 큰 문제였다. 널따란 공터 속을 가득 채운 고민 속에 나는 어느새 고마가와(高麗川)역에 도착했다. 한 가지 절실해진 것은 일본에서 장혁주의 문학과 삶의 흔적을 조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히다카시(日高市) 다카오카(高岡) 1번지

 

 

한국에 돌아와 따스한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때이른 봄에 새삼 놀라고 있던 3 11일 오후, 일본 동북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했으며 그로 인해 거대한 해일이 몰려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거대 해일은 현지의 많은 이들에게는 고통과 절망을 남기고, 일본국제교류기금 펠로십 선정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는 도일에의 간절한 희망을 거두어 저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나의 봄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정된 일정보다 한 달 이상 늦게 펠로십에 선정되었다는 희보(喜報)가 찾아 들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했던가. 낙담했던 만큼 기뻤다. 더군다나 일본에 체류하다 급히 고국으로 돌아간 외국인연구원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도쿄대학 시로카네다이(白金台) 기숙사에서 살 수 있는 행운도 있었다. 삼 년 전 인하대 BK21 지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숙소 문제로 심신이 괴로웠던 경험이 있던 터라 누구에게든 감사하고픈 마음이었다.

2011년 나는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도쿄 최고의 찜통 더위를 경험해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숙명 같은 천재지변을 겪으면서 보다 성숙하게 변화하는 일본사회와 일본인을 느낄 수 있었다. 누가 일본인을 매뉴얼 대로 움직인다 했나. 오히려 일본인은 잠재된 융통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절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좀처럼 자기 집으로 초대하지 않는 일본인이지만 이재민에게 자신의 집을 제공하겠다는 사람들을 보았다. 또 시부야() 한복판에서 원전 반대 시위를 하는 행렬을 한참 바라본 기억도 있다. 후쿠시마(福島)에서 나온 먹거리가 손에 잡히면 그대로 산다는 젊은 남성 헤어디자이너의 말도 생생하다. 재해 발생시 귀가곤란자들을 위해 호텔을 제공하겠다는 사장 등 지진과 해일 그리고 원전 사고가 가져온 각종 문제에 대처하는 일본인들을 접하면서 나는 어느새 웬만한 여진에는 익숙해졌다.

무엇보다도 나의 지도교수로서 숙소부터 각종 서류문제를 친절히 그리고 신속하게 해결해 주신 도쿄대 쓰키아시 다쓰히코(月脚達彦) 교수님께 많은 것을 배웠다. 한국 유학의 경험이 있으신 교수님은 나와 공감대를 잘 형성해 주셨고, 내 연구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격려를 해주셨다. 한편 전공은 달랐지만 외국인연구실에 함께 있던 나이지리아, 중국, 대만, 몽골에서 온 연구원들께 동아시아나아가 세계까지도 인식할 수 있는 값진 기회를 받았다. 또 일본에서 한국문학 또는 한일 비교문학을 공부하는 전문 및 비전문 연구자들과의 만남 또한 내 연구의 참고서가 되었다.

나의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연구를 일단락 맺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버리기로 했다. 내 인생에서 일본 체류기간은 물리적으로는 그리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심리적 혹은 지적으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일본에 체류하면서 모든 일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명확히 배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천재지변까지도 말이다. 장혁주가 살았던 시대와 일본의 모습 또한 그랬을 것이며 그의 문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앞으로 나의 연구도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모습을 하나씩 조명해 보는 연구가 되었으면 한다. 내 연구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신 일본국제교류기금을 비롯해 일본 현지에서 나와 함께 생활해 주신 분들께 드리고픈 감사의 마음을 앞으로의 성실한 연구로 대신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