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詩調) 와카(和歌) 또는 와카와 시조 사이에서

 

장경렬(張敬烈))

서울대학교 인문대 영문과 교수

 

 

 지난 20116월부터 20122월까지 일본국제교류기금의 후원으로 동경 대학교에서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이국 문화 체험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어느 사이에 그러한 문화 체험의 기회가 끝나갈 무렵, 함께 왔던 아내가 보름 먼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런 아내를 전송하고 나리타 공항 전철역에서 도쿄 행 열차에 오른 것은 216일 오후 1시경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여느 일본 사람들이 그러하듯 책을 한 권 꺼내 펼쳐들었다. 내가 펼쳐든 책은 13세기에 편집된 󰡔오구라 햐쿠닌 잇슈󰡕(小倉 百人一首), 이는 아마도 일본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시 선집일 것이다. 책을 읽다가 언뜻 눈을 들어보니 열차는 지하에서 나와 지상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창 밖의 풍경이 오전에 공항으로 가며 보았던 것과는 완연히 달랐다. 숲으로 덮인 낮은 구릉과 그 사이의 들판은 하얀빛을 띠고 있었고, 잿빛의 대기는 뽀얗게 흐려져 있었다. 도쿄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 보기 힘들었던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 탄성이 절로 나왔다. 도쿄 외곽의 전원 풍경이 홀연히 낯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눈 내리는 정경을 수도 없이 경험했고, 그렇기에 내리는 눈 때문에 풍경이 달라지는 것 자체야 신기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눈에 익지 않은 이국의 전원 풍경이 갑자기 낯설어져 있는 것 때문에 나오는 탄성을 막을 길이 없었다. 눈 내리는 전원 풍경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책에 눈길을 주니,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뜻밖에도 눈을 소재로 한 다음과 같은 시였다.

 

 

 

날 밝을 무렵

새벽녘의 달 같아

보이는구나

요시노 마을 위로

내리는 하얀

([あさ]ぼらけ

 / 有明[ありあけ][つき]

 / [みる]までに

 / 吉野[よしの][さと]

 / []れる白雪[しらゆき])

 

 

10세기 경의 인물이라는 것 이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카노우에노 코레노리[坂上 是則, さかのうえの これのり]라는 사람이 남긴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서 눈빛은 새벽녘의 달빛에 비유되고 있다. 빛을 잃어 창백해진 새벽달이 일깨우는 것은 단순히 하얀색이라는 색조만이 아닐 것이다. 고요하고 정지되어 있는 분위기를 일깨우는 것이 새벽녘의 창백한 달이지 않은가. 어찌 보면,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달빛 아래 “날 밝을 무렵”의 세상의 정경까지 떠올릴 수도 있겠다. 달빛 때문이든 또는 여명 때문이든 새벽달이 떠 있는 정경 자체를 지배하는 것이 희끄무레한 빛과 정적이 아닌가. 눈이 내려, 그리고 내린 눈으로 하얗게 변한 마을의 고요함을, 마치 시간과 만물의 움직임이 정지되어 있는 듯한 세상의 분위기가 이 시를 통해 환하게 살아나고 있지 않은가. 또한 흰빛은 색 그 자체의 부재(不在)를 암시하는 색이 아닌 색이기도 하거니와, 눈으로 인해 인간 세계가 부재하게 되었음을 “새벽녘의 달 같아 / 보이는구나”라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멋지다!

눈 내리는 정경을 새벽달 및 새벽달이 떠 있을 무렵의 정경과 겹쳐 제시하고 있는 이 시를 되풀이해 읽는 도중 문득 기억에 스치는 단아한 정취가 가득한 멋진 시조 한 수가 있었다.

 

 

간밤의 눈 갠 景物 달랃고야

압희는 萬頃琉璃 뒤희는 千疊玉山

仙界인가 佛界인가 人間 아니로다

 

이 시조를 통해 윤선도(1587-1671)는 어느 날 “간밤”에 내린 눈으로 인해 “달[]”진 “경물(景物)”에 대한 경외감을 드러내고 있다. “만경유리(萬頃琉璃)”와 “천첩옥산(千疊玉山)”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되는 시인의 경외감은 앞서 제시한 와카의 작가가 눈 내리는 정경을 바라보며 느꼈을 때의 감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코레노리의 와카와 달리 윤선도의 시조는 한 순간의 초월적 세계 이해 또는 감흥을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초월적 세계 이해 자체가 작품의 총체적인 시적 형상화를 완결하고 있지는 않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선계(仙界)인가 불계(佛界)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동시에 “인간(人間)이 아님”을 말하는 이 시조의 종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인의 물음과 이에 대한 그 자신의 답변은 세상이 “인간”이 아닌 “선계”나 “불계”로 느껴질 만큼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말도 되지만, “인간”이 “선계”나 “불계”로 착각될 만큼 경외감을 불러일으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임을 느끼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암시하는 말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선계”나 “불계”라는 말은 “인간”이 얼마나 신비롭게 보일 수 있는가를 표현하기 위한 방편일 뿐, “인간” 자체가 초월의 세계로 변했음을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 “선계”나 “불계”와 “인간” 사이의 경계는 지워지지 않는다. 반면, 위의 와카에서는 그 경계가 지워지는 순간이 암시되고 있다. 다시 말해, 새벽달을 응시하는 시선과 눈 내리는 마을을 응시하는 시선 사이의 경계가 무화(無化)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응시하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시선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이 두 편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선과 인간의 시선을 뛰어넘으려 하는 시선, 그것이 두 문화의 차이는 아닐까.

이러저러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덧 내리던 눈도 그치고 차창 밖의 풍경도 달라져 있었다. 서울 변두리와 다름없이 집들과 상가가 즐비한 도시 외곽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과 미움의 감정을, 이로 인한 아픔과 상처를 사람들이 감출 듯 드러내고 드러낼 듯 감추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에 들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다음 나는 마침내 시나가와(品川)역을 거쳐 시부야()역에 도착했다. 다시 도쿄 시내로 들어선 것이었다. 도쿄 시내의 거리에 들어서자, 열차에서 보았던 눈 내리는 풍경이 마치 꿈속의 한 장면인 양 도대체 현실의 일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은 채 도쿄대학교의 고마바 캠퍼스와 혼고 캠퍼스의 도서관에서, 도쿄 대학교의 카시하--하 캠퍼스 인터내셔널 하우스 주변의 호수 주변과 숲에서, 도쿄 대학교의 시로가네다이 아파트 주변의 주택가와 상가 거리에서 일본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다. 일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지 만 1년이 되는 지금, 그때 그곳에 대한 기억이 나리타 공항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보았던 눈 내리는 풍경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현실의 일부였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만큼 일본 국제 교류 기금이 나에게 마련해 준 일본 문화 체험의 기회는 소중하고 값진 것이었다.

 

* 위의 글은 일본 체류 기간 동안 공부했던 일본의 시문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현재 기획하고 있는 문학 연구서 『한국과 일본 또는 일본과 한국의 정형시 읽기의 원고에서 일부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임

 

 

필자 프로필:

장경렬(張敬烈): 인천 출생으로,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미국 오스틴 소재 텍사스 대학교 영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평집으로 미로에서 길 찾기(1997), 신비의 거울을 찾아서 (2004), 응시와 성찰 (2007), 문학연구서로 코울리지 (2006), 매혹과 저항 (2007), 번역서로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잠든 모습을 보며 (Li-Young Lee, 2000), 야자열매술꾼 (Amos Tutuola, 2002), 먹고, 쏘고, 튄다 (Lynne Truss, 2005), 셰익스피어 (Anthony Holden, 2005), 아픔의 기록 (John Berger, 2008),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Robert Pirsig, 2010), 노인과 바다 (Ernest Hemingway,2012), 백내장(John Berger, 2012), 젊은 예술가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