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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토 준코

 
김매자의 해외 데뷰 - 1983년 뉴욕

뉴욕에 간 것은 1982년, 김매자가 40세였다.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 교수직에 있으면서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던 시절, 뉴욕대학교로부터 초청을 받은 것이었다.

'왜 저에게? 지금 생각해 보니 대학의 무용과 교수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학생을 모집하려고 한 거죠. 저를 평가해서가 아니고. 이 사실은 뉴욕에 도착한 후에 알았어요'

김매자를 초대한 측은 뉴욕대학교 교육학부 무용학과였다.

'박사과정을 밟아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는데,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나라의 무용연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저의 분야는 오로지 한국이었어요.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습니다'

김매자가 말하는 '학생모집'은 일리가 있었다. 그 당시 전세계 대학교에 정규 무용학과가 있는 나라는 많지 않았다. 물론 춤은 태고부터 어느 나라에나 있었고, 대학에서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문화인류학적인 연구대상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무용가는 늘 연구대상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무용가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춤을 해석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학위를 가진 댄서에 주목한 뉴욕대학, 그러나 그들이 이런 선진적인 면을 과연 어느 정도 이해했을까?

실제 뉴욕대학교로 간 김매자가 마주해야 했던 것은 아시아 무용에 대한 끔찍한 무지와 무관심이었다.

 
'한국무용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뉴욕대학에는 민속무용과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오리엔탈댄스라고 하면 일본, 중국, 인도 정도. 그리고 무용은커녕 한국의 문화도, 심지어 한국이라는 국가조차 모르더라고요'

전회에 언급했듯이 일본 신문기자들의 한국에 대한 무지에 탄식했던 김매자는 미국 땅에서는 무용전문가들 속에 있으면서도 고독감에 시달려야 했다.

김매자는 말을 이어갔다.

'실은 우리 한국 사람들 조차도 한국 춤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어요. 저 자신 마저 한국무용이 무엇인지, 그 정체성을 찾고 있었으니까요'

그 시기에 마침 뉴욕대학교에서 초대를 받은 것이다. 처음엔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사절했지만, 우연히 대학의 안식 휴가와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박사과정은 안 하더라도 '3개월만 뉴욕에 있어보자'라는 마음으로 김매자는 한국을 떠나 무용가들이 모여 사는 소호스튜디오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사도라 던컨처럼 춤을 추는 아시아 사람

뉴욕공연은 우연히 찾아 온 것이었다.

'무용가로서가 아니라, 박사과정에 초대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매일 저희 숙소(소호스튜디오)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일상이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춤을 추고 있는데 아래층에 살던 미국여성이 올라왔어요. 그녀도 역시 무용가고 이름은 지나 반스 라고 했어요. 그녀가 저의 무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듣고 올라온 미국무용가가 보게 된 것은 김매자가 추는<살풀이>, <승무> 등의 한국 전통춤이었다.

'우리 아파트에 이사도라 던컨 같은 춤을 추는 동양 사람이 있다!'

이것을 계기로 김매자는 미국 리버사이드댄스페스티벌 무대에 서게 되었다. 한국무용가로서 처음이었다.

 
'<산조춤>을 추면서 계속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너무 많이 울어서 중간에 분장을 다시 해야 될 정도로'

나이 40세, 무용가로서는 숙년기에 접어들었다. 본국에서는 명문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도 있는 김매자가 마치 무대에 처음 서는 소녀같이 울면서 춤을 추었다.

'한국무용은 고사하고 한국이는 나라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드디어 춤 출 기회가 주어지다니. 그것만으로 가슴 벅찼죠'

이런 감개는 김매자만이 아니었다.

공연 4일후 일요일 아침, 뉴욕에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위예술을 하는 홍신자였다. 그녀는 먼저 미국에 건너가 험난한 환경 아래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매자 선생, 큰일 났어. 빨리 신문 보아 봐! 『뉴욕타임즈』 잭 앤더슨이 자기를 격찬하고 있어'

 


 
눈물 흘리며 춤췄다, 뉴욕 첫 공연

한국 무용사에 남는 유명한 '사건'이었다.

실제 『뉴욕타임즈』 기사를 보고 싶어 웹사이트에 들어가 Kim maeja라고 입력해봤다. 2개의 기사가 떴고 그 중 하나는 1983년 11월 기사였다. 제목은 'CHANG MU TROUPE FROM KOREA(한국에서 온 창무회)', 평론가 잭 앤더슨(Jack Anderson)의 서명이 있다. 잭 앤더슨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무용비평가였다. 그가 권위 있는 『뉴욕타임즈』에 한국무용에 관해 기사를 썼다는 건 당시로서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Many were solos for the company's director, Kim Maeja, a professor of dance at Ewha Woman's University in Seoul. In each of them, intense, or even stormy, emotions were channeled into a ritualized form.

춤 레퍼토리의 대부분을 김매자 홀로 소화했다.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 교수인 그녀의 춤에 모든 레퍼토리에서 폭풍처럼 강렬한 감정의 분출을 하나의 의식형태로 수렴하는 기적이 담겨 있었다.



30년 전 기사인데도 그의 흥분이 전해진다. 또한 <살풀이>, <산조>, <태평무>, <승무> 등 김매자 선생이 춘 한국무용의 각각의 움직임이 상세하게 묘사되어있다. 그 일부를 인용하면,


''Seung Mu,'' another melancholy solo, was particularly impressive because of the way Miss Kim's hands were encased in long sleeves that could float in the air like wings, kites or drifting clouds. A simple but effective contrast was achieved when Miss Kim let her hands become visible as she clicked sticks together. This percussive and sharply defined gesture came as a surprise after the nebulous cloudlike gestures, and added a touch of kinetic spice to the dance.

또 하나의 우울함 가득한 솔로 '승무'는 특히 김 씨의 손을 감싸는 긴 소매가 인상적이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긴 소매에 싸인 김 씨의 손은 새의 날개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연처럼, 흘러 가는 구름 같았다. 김 씨가 말뚝을 치려 소매 속에 감춰진 손을 드는 순간에 탄생한 심플하지만 강렬한 콘트라스트. 이런 추상적이며 구름을 잡을 듯한 동작 후, 큰 북을 두드리는 클리어커팅한 몸짓은 그야말로 관객을 압도했다.



김매자는 이 춤을 추면서 울고 있었다,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 오른다.

 
뉴욕의 무용평론가 잭 앤더슨을 깜짝 놀라게 한 김매자는 이것을 계기로 미국뿐 아니라 유럽 무대에도 진출하게 된다. 1827년 창간한 유서 깊은 무용전문잡지 『댄스매거진』은, 1984년 5월호 표지에 김매자를 등장시켰다. 동양인 무용가로서는 최초였다. (1998년에 발레리나 구보코 이치가 표지에 나와 일본에서 최초라 화제가 됐었다)

1984년의 뉴욕공연은 김매자 만의 성공이 아니었다. 한국무용계 전체에도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한국창작무용은 일본이나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 형식을 띤 공연예술로 세계에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뉴욕 무용관계자가 처음 본 한국무용에 열광하던 그 때, 김매자 역시 또 다른 신기한 춤에 마음이 사로 잡혀 있었다. 바로 일본무용 '부토(舞踏)' 였다.

( 다음 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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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東順子

 
キム・メジャの海外デビュー、1983年ニューヨーク

ニューヨークに行ったのは1983年、キム・メジャが40歳の時だった。梨花女子大の舞踊科で教鞭をとっていた彼女に、ニューヨーク大学から招待があった。

「なぜ、私に声がかかったか? 今、思えば大学の舞踊家の教員だったからです。学生をリクルートしたかったから。私自身が評価されてのことではなかったと思います。それはニューヨークに着いてわかりました。」

キム・メジャを招待したのは、ニューヨーク大学の教育学部にある舞踊学科だった。

「博士課程に留学しないか?という誘いだったのですが、当初はそんな時間はないと即決で断りました。その頃の私は韓国舞踊の研究に没頭しており、フィールドはまさに韓国。米国で勉強したいものなどなかったのです」

「学生リクルート」というのは、なるほどわかる気がする。その頃、世界中探しても大学に正規の舞踊学科がある国は少なかった。もちろん舞踊は太古からどんな国にもあったし、大学でそれを研究している人々はいた。ただし、その多くは文化人類学的な研究対象であり、その意味では舞踊家は常に研究される対象だった。ところが韓国の場合は舞踊家自身が主体的に自らのダンスを解明しようとしていた。

「学位を持つダンサー」に目をつけたニューヨーク大学が、そのことの先進性にどれほど自覚的であったかはわからない。とういうのは、実際にニューヨーク大学を訪れた、キム・メジャを待ち受けていたのは、アジア舞踊に対する恐ろしいばかりの無理解だったのだ。

 
「韓国舞踊なんて誰も知らないのです。ニューヨーク大学の民族舞踊科にあったオリエンタル舞踊といえば、日本と中国とインドだけ。舞踊どころか韓国文化も、韓国という国すら当時のアメリカ人は知らなかった。」

連載の冒頭でふれたよう、後に日本の新聞記者の無知を嘆いたキム・メジャだったが、この時は米国の舞踊専門家たちの中で1人、韓国人舞踊家としての悔しさを味わった。

「でもね」と、彼女は言葉を続ける。

「その頃は韓国人自身も韓国舞踊なんて知らなかったのです。私自身がまさに韓国舞踊とは何か、韓国舞踊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探していたのです」

ニューヨーク大学に誘われたのは、ちょうどそのような時だったのだ。瞬間的に「そんな余裕はない」と断ったが、ちょうど大学のサバティカル休暇と時期が重なった。そこで「博士課程には行かないが、3ヶ月だけなら」と、ニューヨーク行きを決めた。そして、ダンスのメッカであったソーホーのスタジオに寝泊まりすることになったのだ。

 


 
イサドラ・ダンカンみたいなダンスを踊るアジア人

ニューヨーク公演のきっかけは偶然だった。

「前にも言いましたが、博士課程に誘われたのであって、ダンサーとして招待されたわけではなかったのです。でも、私は舞踊家なので毎日練習します。それが日常ですから。ある日、スタジオで踊っていたら、階下に住んでいた米国人の女性が上がってきた。彼女もやはりダンサーで名前はジナバンス。そして私の舞踊を見てものすごく驚いた。」

部屋からもれる音楽を聞きつけてやってきた米国人ダンサーが見たのは、キム・メジャが踊るサルプリや僧舞だった。彼女にとっては初めて見るダンスである。

「うちのアパートにイサドラ・ダンカンみたいなダンスを踊るアジア人がいる!」

それがきっかけとなり、キム・メジャはリバーサイドダンスフェスティバルの舞台に立つことになった。

 
「サンジョ(散調)を踊りながら涙が出て止まらないんです。やっとダンサーとして、私の踊りを見てもらえる」

40歳、舞踊家としては熟年期だ。本国では名門梨花女子大学教授という社会的地位もある。そんな彼女が初めて舞台に立った少女のように大泣きしながら踊った。泣きすぎて幕間にメイクを直さなければいけないほどだったという。

「韓国舞踊はおろか、韓国という国すら知られていなかった。日本や中国とごっちゃにされる。やっと踊る機会を与えられた。それだけで感無量だったのです」

感無量はキム・メジャだけではなかった。

舞台から4日後の日曜日の早朝、キム・メジャが寝起きしていたソーホーのスタジオに、ニューヨーク在住の友人が電話をかけてきた。前衛舞踊家のホン・シンジャだった。キム・メジャより2歳年上の彼女は先に渡米し、厳しい環境下の活動を続けていた。

「メジャ、大変なことになっている。早く、ニューヨーク・タイムスを見て。ジャック・アンダーソンがあなたのことを絶賛している」

 


 
泣きながら踊った、ニューヨークの初舞台

韓国の舞踊史の残る有名な「事件」である。

実際のニューヨーク・タイムスの記事を調べてみようと、新聞社のサイトにkim maeja と打ち込んで検索してみた。2件の記事がヒットし、そのうちの一件がこの1983年11月の記事だった。アート欄のタイトルはCHANG MU TROUPE FROM KOREA(韓国からきた創舞会)、JACK ANDERSONの署名がある。
▶ 1983年11月のニューヨーク・タイムス記事

ジャック・アンダーソンは当時、米国でもっとも有名なダンス評論家だった。その彼が権威あるニューヨーク・タイムスで韓国舞踊についてのコラムを書く。当時としては、これだけでも大事件だった。


Many were solos for the company's director, Kim Maeja, a professor of dance at Ewha Woman's University in Seoul. In each of them, intense, or even stormy, emotions were channeled into a ritualized form.

「演目の多くはキム・メジャ氏によるソロであった。ソウルの梨花女子大学舞踊科教授である彼女のダンスはすべての演目において、嵐のような強烈な感情のほとばしりがひとつの儀式の形式へと収斂されるという奇跡がそこにはあった。」



30年以上前に書かれた記事であるが、今、読んでも彼の興奮が伝わってくる。さらに、サルプリ、散調、太平舞、僧舞、というキム・メジャが踊った韓国舞踊の、それぞれの所作が丁寧に描写されている。一部を引用したい。


''Seung Mu,'' another melancholy solo, was particularly impressive because of the way Miss Kim's hands were encased in long sleeves that could float in the air like wings, kites or drifting clouds. A simple but effective contrast was achieved when Miss Kim let her hands become visible as she clicked sticks together. This percussive and sharply defined gesture came as a surprise after the nebulous cloudlike gestures, and added a touch of kinetic spice to the dance.

「もう一つの憂いに満ちたソロ`僧舞'は、キム氏の衣装のその手を包み込む長い袖が特に印象的であった。風に漂う長い袖に包まれたキム氏の手は、時に鳥の翼のように、空を舞う凧のように、また流れる雲のようであった。キム氏が棒を打ちならそうとして(袖の中から)その手をのぞかせる瞬間に生まれるシンプルで強烈なコントラスト。抽象的で雲をつかむようなしぐさの後で、この太鼓を叩くクリアカッティングなしぐさは、まさに一つの戦慄として観客を圧倒した。」



キム・メジャ先生はこれを踊りながら泣いていた、それを思うとこみ上げてくるものがある。

 
ニューヨークきっての舞踊評論家ジャック・アンダーソンを驚かせたキム・メジャは、これを機に米国はもとより、欧州の舞台にも進出することになる。また、1827年創刊の由緒ある舞踊専門誌「ダンスマガジン」は、1984年5月号の表紙にキム・メジャを採用した。アジア人ダンサーとしては初の「快挙」であった。(1998年にバレエの久保こういちが表紙を飾り、日本人初と話題になった)。

1984年のニューヨーク公演はキム・メジャ個人にとってだけでなく、韓国舞踊全体にとって記念すべき一歩だった。以降、韓国舞踊は日本や中国とは違う、独自の形式をもった舞台芸術として世界に認知されることになる。

ところで、ニューヨークのダンス関係者が初めて見る韓国舞踊に熱狂した同じ時、キム・メジャもまた好奇心をかき立てられるダンスに遭遇していた。BUTOH? 日本のダンスだった。

( 次回に続く )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