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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토 준코

 
부토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본적 없는 춤이었습니다. 놀랐어요. 그 춤을 추던 사람은 나카지마 나츠라는 일본 댄서였죠."

한국, 혹은 서양에서 알고 있는 부토는 일본어로 '舞踏'라고 표기되며 1960년대 말 일본 무용계에 등장한 현대무용의 한 종류이다. 시작은 히지카타 타츠미(土方巽)'暗黒舞踏(암흑부토)'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암흑부토가 많은 변화를 거쳐 부토의 개념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아직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부토의 제1세대 무용가라고 꼽히는 히지카타 타츠미, 오오노 카즈오(大野一雄), 또는 카사이 아키라(笠井叡)는 당시 일본 예술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일본 대중에게 까지는 그 지명도가 높지 않았는데, 1970년대 말 이것이 해외 평단에 소개되자 일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단한 일들이 펼쳐졌다.

그 발화점은 1980년 프랑스 낭시에서 열린 국제페스티벌이었다. 전통 있는 이 유럽 페스티벌에 오노 카즈오, 카사이 아키라, 산카이 주쿠(山海塾), 다나카 민의 4명으로 이루어진 무용 팀이 초청을 받아 '舞踏'를 일본어 발음 그대로 읽은 'Butoh'라는 이름으로 세계 무용무대에 데뷔한 것이다. 그중 특별히 유럽인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당시 이미 78세였던 오오노 카즈오의 '존재'였다.

그 발화점은 1980년 프랑스 낭시에서 열린 국제페스티벌이었다. 전통 있는 이 유럽 페스티벌에 오노 카즈오, 카사이 아키라, 산카이 주쿠(山海塾), 다나카 민의 4명으로 이루어진 무용 팀이 초청을 받아 '舞踏'를 일본어 발음 그대로 읽은 'Butoh'라는 이름으로 세계 무용무대에 데뷔한 것이다. 그중 특별히 유럽인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당시 이미 78세였던 오오노 카즈오의 '존재'였다.

나카지마 나츠는 오오노 카즈오보다 젊은 세대지만,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 중인 무용가였다.

"일본 전통춤은 얼굴 하얗게 분장하고 기모노를 입죠. 그런데 그 신기한 신체 움직임은 제가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인은 한국에 대해 무지했지만, 한국인은 일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무용가인 김매자는 일본전통춤의 유파인 하나아기 류(花柳流)를 배우는 등 일본전통문화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하지만 김매자가 보았던 나카지마 나츠가 추는 '부토'라는 춤은, 그런 일본전통과는 아주 이질적이었다.

마침 유럽에서 파문을 일으킨 산카이 주쿠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올림픽 기념 댄스페스티벌을 기점으로 전미 투어를 한다는 정보를 들은 김매자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전신을 흰색으로 분장한 알몸의 남자들, 침묵 속에서 벌어지는 신기한 춤. 세계 무용계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고 판단한 그녀는 재빠르게 다음 행동으로 옮겼다.

 


 
1985년 오오노 카즈오 워크숍
 
김매자의 대단한 점 중 하나는 자신의 감동과 놀라움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힘이다. 그녀는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부토 공연을 준비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시작되어 세계 예술계의 큰 화제인 이 춤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고, 한국 친구들에게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나카지마 나츠에게 한국에 부토 공연을 올리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니, 그렇다면 나츠가 오오노 선생님을 소개하겠다고 했어요. 너무 기뻤죠."

'그 선생님'이라면 바로 그 오오노 카즈오, 김매자는 즉시 준비를 시작했지만 커다란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 교수, 쉽지 않네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본 무용공연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지금에야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가 싶지만, 1980년대 한국 사회는 일본문화에 대해 엄격한 제한이 많았다. 가요나 영화 등 대중문화는 물론, 무용이나 연극 상연도 어려웠다.
그 이전인 1972년에 군사정권 하의 서울에서 카라 주로(唐十郎)가 무허가 연극공연을 올린 것은, 일본에서는 전설적인 사건이었다. 그 후에도 일본 연극 팀이 수 차례 한국공연을 시도했고, 그들 중에는 한국으로의 입국이 거부되는 것을 군사정권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정치체제 이전에 '일본문화' 자체를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그 배경에 깔려 있었다. 극단 스바루(昴)와 같이, 예외적으로 허가된 공연도 있었지만, 공연 후 비판적인 의견이 언론을 뒤덮었다.

참고로 극단 스바루는 후쿠다 츠네아리(福田恆存)의 명성과 한국 연극협회 회장(1979년 당시)인 김정옥씨의 개인적인 관계로 공연이 인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1983년에는 "발견의 회(発見の会)"가 삼일로의 창고극장에서 공연을 했지만, 이 또한 이원경씨가 자신의 공간에 친구를 초청해서 실시한 "사적인 공연"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한국 입장에서 일본의 문화는 정치체제를 넘어 국가의 정체성과도 관련된 민감한 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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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東順子

 
BUTOH (舞踏) とは何か

「それは今まで見たこともない舞踊だったのです。びっくりしました。踊っていたのは、中島夏という日本人ダンサーでした。」

 BUTOHとは日本語では「舞踏」と表記される、1960年代末に日本のダンスシーンに登場したコンテンポラリーダンスだ。その起源は土方巽が始めた「暗黒舞踏」にあるが、後に様々な変遷があり、定義にはさまざまな議論がある。また、土方巽、大野一雄、笠井叡という第一世代の舞踏家らは、当時から一部で高い評価を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舞踏そのものは日本ではマイナーな領域にとどまっていた。ところが1970年代末に「舞踏」が海外で紹介されると、日本国内では考えられないようなことが起きた。

着火点となったのは、1980年にフランスのナンシーで開かれた国際演劇祭だった。この伝統あるヨーロッパのフェスティバルに大野一雄、笠井叡、山海塾、田中泯という4人の日本人ダンサーが招待され、舞踏はBUTOHという名前で世界のアートシーンにデビューを果たすことになる。中でも大きな衝撃を与えたのは当時すでに78歳だった大野一雄の存在だった。
彼の肉体が描く崩れゆくような希薄な線、存在を弱めることにエネルギーを注ぐ逆転の美学は、その醜悪の縁に反転する美の奇跡とともに、ヨーロッパの同時代のアーティストにとって衝撃であり、各国の評論家はそれをどう表現するかにしのぎを削った。

中島夏は大野一雄より下の世代だが、すでに欧州や米国での活動を開始していた。
「白塗りの顔に着物。それは日本の伝統なのですが、その動きは初めて見るものでした」
 日本人は韓国について無知だったが、韓国人の側は日本をよく知っていた。特に舞踊家であるキム・メジャは花柳流の日本舞踊も習うなど、日本の伝統文化には精通していた。でも、中島夏が踊る「舞踏」なるものは、明らかに異質だった。

 折しも、欧州ではセンセーションを巻き起こしていた山海塾が、ロサンゼルスオリンピックの記念ダンスフェシティバルを皮切りに全米ツアーを行うというのでそれにも駆けつけた。
 全身を白塗りにした裸の男達が、無音の中で繰り広げる不思議なダンス。これは大変だと思ったキム・メジャは即座に次の行動に移った。

 


 
公演許可が降りない、大野一雄の初のソウル公演(1985)
 

キム・メジャがすごいのは、自分の感動や驚きを即座に燃料に変えて動き出すパワーだ。帰国したキム・メジャはすぐに韓国での舞踏公演の準備を始める。お隣の日本で始まっている、新しいダンスの動き。それが世界的なアートシーンの最前線で話題になっている。これをもっと知りたいし、韓国の仲間たちに知らせたい。
「中島夏さんにその話をしたら、では大野先生と一緒に行きましょうと言ってくれたんです。それはうれしかった」

大野先生とはまさに「あの大野一雄」である。キム・メジャは早速準備を始めたのだが、前方には大きな壁が立ちはだかっていた。

「キム教授、それは無理ですよ。日本人のダンス公演なんかできるはずがない」
今となっては隔世の感があるが、1980年代の韓国では、日本文化に対して非常に厳しい制限があった。日本の歌謡曲や映画はもちろん、舞踊や演劇の類も上演は難しいと考えられていた。

それ以前の1972年に、軍事政権下のソウルで唐十郎が『二都物語』を無許可で上演したことは、日本では伝説化した事件である。それ以降も一部の劇団によって韓国公演は何度か目論まれ、中には韓国への入国拒否を「反体制の勲章」のように語る向きもあったが、反体制かどうか以前に「日本文化」そのものがタブーだった。中には劇団昴のように例外的に許可された公演もあったが、上演後には批判的な意見がメディアを埋め尽くした。

ちなみに劇団昴は福田恆存の保守としての名声と韓国演劇協会会長(1979年当時)であった金正鈺氏の個人的な関係で上演が認められたと言われている。また1983年には「発見の会」が三一路の倉庫劇場で公演をしているが、こちらも李源庚氏が自らの空間に友人を招いて行った「プライベート公演」的な性質が強いものだった。

韓国にとって「日本文化」は単なる政治体制の問題を超えた、国家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にかかわる、最も重要なテーマだった。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