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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토 준코

 
한국땅을 밟다


2015년 연말, 도쿄에서 야마다 세쓰코를 만났다. 먼저 <봄의 제전-완성 편>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이 연재의 첫머리에 썼듯이, 야마다 세쓰코의 <봄의 제전>은 2015년 8월 서울 창무 국제 무용제에서 <봄의 제전-하이라이트>로 발표되었으며, 한국 평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었다.

"김매자 선생님도 그 작품 칭찬을 많이 하시던데요."

그 이야기를 하니까 야마다 세쓰코는 웃음을 참듯이 말했다.

"'그래, 생각보다 잘했네'라고 하셨어요."

세쓰코는 김매자의 말투를 흉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김매자 선생님은 호기심 많으시고, 도량도 넓어서 뭐든지 받아들여요. 그러나 평가는 엄격합니다."

그것은 세쓰코도 마찬가지다. 프로는 남에게도, 자신에게도 냉철한 기준을 가진다. 두 사람은 장르는 달랐지만 오랫동안 서로에게 좋은 라이벌이었으며 정확한 비평가 역할을 했다.

정말 근사한 작품은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제대로 전달된다. 추상성이 높은 현대예술이 필자와 같은 문외한에게도 감동을 줄 때, 그 자체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몸이 떨렸다", "눈물이 났다",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감동은 언제나 뜻밖에 찾아온다. 필자가 지금 이렇게 김매자와 야마다 세쓰코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두 사람의 춤에 말로 표현 못 할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춤을? – 김매자로부터의 초대

김매자는 지난 8월 <봄의 제전>을 보면서, 야마다 세쓰코의 춤을 맨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고 했다.

"야마다 세쓰코? 이것도 부토라고?"

당시 신선한 충격을 받은 김매자는 처음 개최하는 국제무용페스티벌에 세쓰코를 초청했다. 1985년,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의 이야기이다. 야마다 세쓰코는 김매자의 초청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한국에서 공연을 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듣고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한국에서 공연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보았거든요."

이전에도 썼지만 1980년대에 들어 일본의 부토가 해외에서 열풍을 일으키면서 많은 일본인 무용가들이 국제행사에 초청받았다. 야마다 세쓰코도 1983년에 아비뇽(프랑스), 바르셀로나(스페인), 1984년에는 샤토바롱(프랑스) 등 지역의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등, 그녀의 영역은 나라 밖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서양 국가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아시아권 축제에서의 초대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당시 현대무용은 유럽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고, 아시아는 변두리였다. 부토의 본 거지인 일본조차, 그 땅에서 태어난 최신 현대 무용에게 유럽보다 못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부토는 일본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평가가 높았다'는 점은 과거나 현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시 그 '해외'에 한국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 원인은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탈아입구' 적인 흐름에 있는지도 모른다. 보고 배울 것은 언제나 서양에 있다고만 생각해 왔다. 한국의 국제적 지위 역시 관계없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은 정치·경제부터 엔터테인먼트까지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고 있고, GDP 수준도 일본을 뛰어넘을 기세의 한국이지만, 당시의 일본인에게 한국은 아시아의 개발도상국 중 하나에 불과했다.

다만, 야마다 세쓰코는 다른 일본인 아티스트와 조금 사연이 달랐다. 그녀의 남편인 남상길은 재일교포 2세, 그 동생 남상영은 한국에서 유학 중이었다.

 
 
야마다 세쓰코의 갈등

"내 고향에서 춤을 못 춘다는 거야?"

한국에서 온 초청에 당황하는 야마다 세쓰코에게, 남편은 슬쩍 말했다. 그 역시 예술가이며 부토를 통해 야마다 세쓰코를 만났다. 따뜻한 색채로 아이들을 그리는 남편은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농담처럼 "내 고향"이라고 말했지만, 한국은 그에게도 그저 아버지의 고향일 뿐, '낯선 땅'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리 세대의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한국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저는 우연히 재일한국인과 결혼했지만, 그래도 역사적인 부분에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일본인으로서의 전쟁 책임, 그런 문제죠. 그 생각을 하면 가벼운 기본으로 쉽게 한국에 갈 수는 없었어요. 주저하게 되었고요."

그녀가 한국 행을 고민하던 1985년은 한일관계도 크게 흔들리던 시기였다. 1982년에는 일본 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한국의 반일감정이 고조되어, 뉴스에서는 '일본인 승차거부 택시'가 보도되었고, 1984년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하여 역사 문제가 대대적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일본인 스스로도 과거의 역사와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자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야마다 세쓰코는 한국에 가기로 했다.

"고민하던 차에 요모타 씨의 글을 읽었어요. '왜 한국인가'라고 한다면, 반대로 '왜 한국이 아닌가'라는 질문도 가능해요. 한 개인으로서 한국에 간다.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는 영화 평론가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1953년생, 세쓰코와 같은 세대인 그는 동경대 대학원을 졸업한 후인 1979년, 한국의 건국대학교에 교원으로 부임한 경험도 있다. 『우리의 타자가 되는 한국』(삼각형북스)등 그의 일련의 저작에는 속죄의식이 깔린 일본인의 기존 한국론, 또는 일본과의 문화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언론의 한국문화론과는 분명히 구별된 사상이 담겨 있었다.

필자도 그의 저작에 감명받은 사람 중 하나다. 한일 간 국가관계와 문화적 차이에 여전히 얽매이는 자세는, 한국을 뭉뚱그린 이미지로 추측함과 동시에, 일본인 자신도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버린다. 한국에도 다양한 얼굴이 있고, 또 한국인 개개인도 여러 가지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본인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가기로 한 야마다 세쓰코는 한 가지 더 마음먹은 것이 있었다. "혼자 간다"는 것이었다. 함께 한국에 가려고 생각했던 남편을 두고 혼자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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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東順子

 
韓国の土を踏む


2015年の年末、東京で山田せつ子に会った。まずは『春の祭典』の完成版の話が出た。この連載の冒頭に記したよう、『春の祭典』は、昨年8月にソウルでダイジェスト版のお披露目があり、韓国の専門家の間でも高評価を得た作品だった。

「キム・メジャ先生もあの作品のことは、とても褒めてい

ましたよ」 そんな話をすると、山田せつ子は笑いをこらえるように言った。

「'うん、思っていたより、いい出来だった'って言われまし

た」 せつこはキム・メジャの口調を再現したあと、さらにこう

付け加えた。 「キム・メジャ先生は好奇心旺盛だし、懐も広いから、なんでも受け入れる。でもね、ジャッジは厳しい

」 それはせつ子も同じだ。プロフェッショナルは他者にも己にも、専門家としての厳しい視線をもつ。二人はダンスのジャンルこそ違え、長きにわたり良きライバルであり、的確な批評家だった。ただ、本当に素晴らしい作品というのは、専門家だけでなく一般人にもきちんと伝わる。抽象性の高い現代芸術が、私のような素人をも感動させるとき、それ自体がまた感動だ。

「体が震えた」「涙が出た」「その像が頭から離れない」…、それはいつも思いがけずにやってくる。今、こうして私がキム・メジャと山田せつ子について書いているのも、二人の舞台に魂を抜かれてしまったから。急いで書いて、魂を取り戻さないと、次のステップに行けない。

 


 
韓国で踊る? ―金梅子からの招待(1985)

キム・メジャは2015年8月の『春の祭典』を見ながら、初めて山田せつ子のダンスを見た時のことを思い出したという。

「山田せつ子? これが舞踏?」 ――その時の新鮮な衝撃がキム・メジャに、自らが初めて主催する舞踊フェスティバルにせつ子を招聘することを決めさせた。1985年、今からちょうど30年前のことである。山田せつ子にその時のことを聞いてみた。

「韓国で踊らないか? と言われたときは、正直に言って戸惑いました。韓国で踊るということは、一度も考えたことがなかったのです」

これまでも書いてきたように、1980年代に入り日本の舞踏が海外でブームを巻き起こし、多くの日本人ダンサーが海外のフェスティバルなどに招待されていた。山田せつこも1983年にアヴィニオン(フランス)、バルセロナ(スペイン)、1984年にはシャトーヴァロン(フランス)などのフェスティバルで公演を行っており、フィールドは世界に広がっていた。が、それはあくまでも欧米のことであり、アジアというのはまったく想定外だった。

当時、コンテンポラリーダンスは欧州中心に展開しており、アジアは辺境の地。そもそも「舞踏」を生んだ日本さえ、自国で生まれた最新のコンテンポラリーダンスに欧州以上の評価を与えられなかった。もっとも、舞踏に限れば、「日本よりもむしろ海外での評価が高い」というのは、今も同じかもしれない。ところで、その「海外」に韓国は含まれていなかった。

それは日本の近代化の過程で形成された「脱亜入欧」的な感情のせいかもしれない。お手本はいつも欧米にあると思われていた。さらに韓国の国際的地位も関係があっただろう。今でこそ、政治経済からエンターテイメントまで、あまたの国際舞台で活躍し、GDPも日本を超える勢いの韓国だが、当時に日本人にとってはアジアの発展途上国の一つに過ぎなかった。

ただ、山田せつ子の場合は他の日本人アーティストとは違う、少し特別な事情を抱えていた。彼女の夫である南相吉は在日韓国人2世、義弟は韓国留学中だったのだ。

 


 
山田せつ子の葛藤

「俺の故郷で踊れないわけ?」

韓国からの招聘に戸惑う山田せつ子に、在日韓国人の夫はさらっと言った。彼もまたアーティストであり、せつ子とは舞踏を通じで知り合った。暖かな色彩の子供の絵で知られる南相吉(南椌椌)は、相手を理詰めで説得するような人ではない。それに、冗談ぽっく「俺の故郷」とは言ってみたものの、彼にとっても韓国はただ父親の出身地というだけで、未知の土に違いなかった。南にもまたさまざまな思いがあったと思うが、それは稿を改めることにし、ここではふれない。

せつ子の話を続ける。

「私の世代の日本人なら、誰もが韓国に対して複雑な感情があると思うのです。私の場合はたまたま在日韓国人と一緒になったとはいえ、やはり歴史的なことでの負い目がありました。戦争責任の問題です。そういうことを考えると韓国には軽い気持ちでは行けない。やはり躊躇してしまうのです」

彼女が韓国行きを悩んでいた1985年は、日韓関係が大きく動いた時期であった。1982年には日本の歴史教科書をめぐって韓国で反日感情が高まり、ニュースでは「日本人乗車拒否」のタクシーが映し出されもした。その後、1984年には全斗煥元大統領が韓国の大統領として初めて日本を公式訪問し、歴史問題が再び俎上に載った。過去にどう向き合うか、日本人は自問せざるを得なかった。その一方で、全斗煥という人物については、光州事態などでの強硬派のイメージも強く、韓国の印象を重苦しくさせていた。

それでも、せつ子を韓国に行こうと思った。

 「悩んでいたときに、四方田さんの一文を読んだのです。'なぜ韓国なのか'というなら、じゃあ、'なぜ韓国ではないのか'という問いも成り立つと。ひとりの個人として韓国に、行く。それでいいと思ったのです」

四方田犬彦は映画評論家として韓国でもよく知られている。1953年生まれ、せつ子と同世代の彼は東京大学大学院を卒業した後の1979年、韓国の建国大学に教員として赴任した経験がある。『われらが<他者>なる韓国』(五月叢書)<우리의 타자가 되는 한국>요모타 이누히코|역자 양경미|삼각형북스 |2001.01.01 などの一連の著作は、日本人としての贖罪意識を基本とした従来の韓国論や、あるいはエキゾチシズムが過度に強調されるメディアの韓国文化論とも一線を画したものだった。

私自身も彼の著作から学んだ一人だ。日韓の国家関係や民族文化の差にこだわることは、韓国をのっぺらぼうな塊としてとらえると同時に、日本人である私自身ものっぺらぼうにしてしまう。韓国には実に多様な顔の人がいるし、一人一人がまた多様な表情をもっている。そしてそれは日本人である私自身もまた同じなのである。

韓国に行くことを決意した山田せつ子は、もう一つ、心に決めていることがあった。それは「一人で行く」ことだった。一緒に渡韓するつもりでいた在日韓国人の夫を残し、単身ソウル行きの飛行機に乗った。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