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이토 준코



전혀 다른 전통의 개념

 

1986년 창무 아시아 무용 축제를 계기로 야마다 세츠코는 매년 한국을 찾게 되었다. 고심 끝에 결정한 한국 공연, 거기서 얻은 것은 예상 외로 컸다.

"처음 본 한국 춤, 그 전통적인 기법이 이웃나라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줄 전혀 몰랐어요. 유럽에 갔을 때보다 훨씬 큰 충격이었습니다."

근대 이후 일본의 예술가들은 서양의 예술에 꾸준히 시선이 향해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에서 보는 것들은 대략 짐작이 가능했다. 발견이나 놀라움도 예상 밖의 것은 아니다. '거기에 새로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시아는 달랐다.

김매자가 뉴욕에서 일본의 부토를 보고 놀란 것처럼, 야마다 세츠코도 서울에서 한국무용을 접하곤 충격을 받았다. 유럽보다 훨씬 가까운 같은 아시아권의 이웃이면서도 일본인도 한국인도 서로를 너무나 알지 못했다. 야마다 세츠코는 "애초에 일본과 한국에서는 '전통'에 대한 생각이 아주 다르다"고 했다.

"나를 포함한 일본 예술가들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말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통'이라는 것은 반역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기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민족은 둘도 없는 것이며 전통 속에서 항상 새로운 것이 생겨납니다. 전통인데도 아주 생생해요. 일본에서 생각했던 전통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한국와 일본이 각각 전통의 의미를 다르게 가진 것은 양국의 역사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사상의 잘못된 인식과 일제강점기의 동화 정책으로 한국의 전통문화의 대부분이 사라져버렸다"고 김매자가 한탄하는 반면, 에도시대의 일본에서는 노, 가부키 등 대중 예능이 전성기를 맞았고, 메이지시대 이후에도 서양에 대항하기 위해 전통 문화는 국책으로 보호되었다. 거기에 일본 특유의 "종가 제도"가 개입되어 일부 전통은 권력화되었다.

야마다 세츠코 등 일본 아티스트에게 전통은 "싸우고, 넘어야 할 대상"이었지만 김매자에게 한국의 전통은 "찾아내고, 복원해야 할 대상"이었다.

 




 

 




 

김매자와 한국무용의 행보

여기서 김매자의 이력을 더듬으면서 한국무용의 역사를 돌아보고자 한다.

김매자는 1943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군사분계선 근처에 있던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하여 거기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유행하던 창극에 푹 빠졌었습니다. 무대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당시 부산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이 사는 곳으로, 그 중에는 무용가들도 있었다.

"부모님은 제가 무용을 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셨어요. 당시 한국에서는 노래와 춤을 배우는 것은 기생이나 할 짓이라 하더군요."

그런 부모를 설득하여, 고등학교 때부터 김매자는 본격적으로 무용을 배우게 된다.

"당시 제가 배운 것은 소위 말하는 '신무용'이었어요. 당시는 그 춤들뿐이어서, 그것이 전통무용이라고 생각했죠."

"신무용"이란 최승희의 춤을 계승한 무용을 말한다. 서울에서 태어난 최승희는 1926년에 15세의 나이로 도쿄에 건너가서 이시이 바쿠에 입문했다. 현대무용가로 유명했던 바쿠는 그녀에게 조국의 전통무용을 활용하기를 권했다. 그것이 해방 후 한국과 북한에서 "한국무용"으로 이어졌다.

"고등학교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신무용>을 열심히 췄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와 대학교에서 배우면서 여러 가지 의문들이 생겼어요. 특히 어느 날 한 흑인 모던댄서의 춤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자연스러운 신체, 그 자체의 아름다움. 그에 비하면 당시 한국무용은, 그저 예쁘게 미소를 지으면서 화려하게 춤을 추는 것뿐이었죠. 이것으로는 내 감정을 전부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매자는 대학원에 진학한 1960년대 중반부터 한국 무용의 원류 찾기를 시작했다. 마침 한국 정부도 문화재 보존에 착수하여, 무형문화재 제1호에는 궁중무용 김천흥이 지정되었다.

"김천흥 선생님께 궁중무용을 배우고 또 한영숙 선생님께 승무와 살풀이를 배우는 등 최승희 이전의 전통무용을 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어요. 한국무용의 뿌리는 더 깊었던 것입니다."

김매자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종교의식 속 무용이었다. 종교란, 오래 전부터 한국과 함께한 무속신앙과 불교이다. 어느 정도 그 형식이 보존되어 있었던 불교무용과는 대조적으로, 무당춤은 지역과 사람에 따라 그 형태가 다양했다. 김매자는 지방을 돌아다니며 숨어있는 민속춤을 찾아 다녔다. 이것은, 한국무용의 뿌리를 찾는 여행이었다. 단지 무용의 형식에 그치지 않고 한국인의 신체성과 정신성을 확인하는 것이 그녀의 관심사였다. 김매자는 이때 다른 분야의 학자들과 함께 "향토축제협의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  

 

伊東順子



まったく違う伝統の概念

 

 1986年の創舞アジア舞踊フェスティバルを契機に、山田せつ子は毎年のように韓国を訪れるようになった。戸惑いの末に決断した韓国公演だったが、そこで出会ったものは予想外に大きかった。

「初めて見た韓国舞踊、その伝統的な技法、身体性。なによりも自分の隣の国に、こういうものが脈々と流れていることを、私はまったく知らなかったのです。ヨーロッパに行った時よりも、はるかに衝撃を受けました。」

近代以降、日本のアーティストにとって、西洋はいつもお手本だった。だからヨーロッパで出会うものは、あるていど予想がつく。発見や驚きであろうとも想定内である。「そこに新しいものがある」のは、当たり前だからだ。ところが、アジアは違う。

ニューヨークでキム・メジャが日本の舞踏を見て驚いたように、山田せつ子もまたソウルで韓国舞踊を見てショックをうけた。距離的にはヨーロッパよりはるかに近いアジアの隣国。にもかかわらず、日本人も韓国人もお互いについて驚くほど知らない。山田せつ子は「そもそも日本と韓国では`伝統'に対する考え方が全く違う」という。

「日本のアーティストは国家や民族という言葉に警戒心をもっているし、伝統とは反逆すべき対象でした。ところが韓国では、民族はかけがえのないものであり、伝統の奥の方からは常に新しいものが生まれてくる。伝統なのに生き生きしている。日本で思っていた伝統の概念とはまったく違ったのです」

日韓のアーティストがそれぞれの伝統文化に対する思いを異にするのは、両国が歩んできた歴史に関係する。

「李朝時代の儒教思想による誤った認識と日本統治時代の同化政策により、韓国の伝統文化の多くが失われてしまった」とキム・メジャが嘆く反面、江戸時代の日本では能や歌舞伎などの大衆芸能が花開き、さらに明治以降も欧米に対抗するため伝統文化は国策的に保護された。そこに日本独特の「家元制度」なども介入し、伝統の一部は権力化していった。

山田せつ子たち日本のアーティストにとって伝統は「戦い、超えるべき対象」であったのに対し、キム・メジャたちにとって韓国の伝統は「探し当て、復元すべき対象」だった。

 




 

 



 

キム・メジャと韓国舞踊の歩み

 ここでキム・メジャの履歴をたどりながら、韓国舞踊の歴史を少し振り返ろうと思う。

キム・メジャは1943年に江原道高城で生まれた。1950年に朝鮮戦争が起きると、軍事境界線近くの生まれ故郷から家族とともに釜山に避難し、そこで小中高時代を過ごした。

「当時は唱劇(歌劇の1つ)が流行で、それに夢中になり、将来はその舞台女優になりたいと思っていました」

当時の釜山は韓国全土から集まった避難民の町で、その中には舞踊の先生などもいた。

「両親は私が舞踊をするのに大反対。当時の韓国では歌や踊りを習うのはキーセンのすることだと言われました」

そんな両親を説得し、高校生になったメジャは本格的に舞踊を習うことになる。

「当時、私が習ったのは、今でいう<新舞踊>と言われるものです。当時はそれしかなく、それが韓国の伝統舞踊だと思っていました」

「新舞踊」というのは、日本の植民地時代に一世を風靡した舞踊家・崔承喜(チェ・スンヒ)の踊りを継承するものだ。ソウルで生まれた崔承喜は1926年、15歳で東京の石井漠に入門する。モダンダンスの第一人者だった石井は、崔承喜に祖国の伝統舞踊を取り入れることを薦めた。それが戦後に韓国と北朝鮮で「韓国舞踊」(新舞踊)として受け継がれた。

「高校時代は何の疑いもなく、<新舞踊>を踊っていました。ところがソウルに上京して大学で学びながら、いろいろ疑問が出てきたのです。特にショックだったのは、ある黒人のモダンダンサーの舞踊でした。その自然な身体、そのものの美しさ。それに較べて、当時の韓国舞踊といえば、美しく微笑みながら華やかな衣装を装い舞うことばかり。これでは私の感情は表現できないと思いました」

キム・メジャは大学院に進学した1960年代半ばから、韓国舞踊の源流を探す旅を始めた。おりしも韓国政府は文化財の保存に着手しており、無形文化財の第1号には宮中舞踊の金千興(キム・チョンフン)が指定されていた。

「キム・チョンフン先生からは宮中舞踊を習い、さらにハン・ヨンスク先生からは僧舞やサルプリなど、崔承喜以前の伝統舞踊の指導を受けました。でも、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韓国舞踊の奥はもっと深かったのです。」

キム・メジャが特に注目したのは、宗教儀式における舞踊だった。宗教とは韓国に古くからあるシャーマニズムと仏教である。ある程度、形式が保存されている仏教舞踊とは対照的に、シャーマンたちの舞踊は地域によっても人によっても様々な形があった。その1つ1つを訪ねることは、韓国舞踊の根っこを探す旅であり、それは単に舞踊の形式にとどまらない、韓国人の身体性と精神性を確認するものだった。キム・メジャは他の分野の学者などと一緒に、「郷土祝祭協議会」という団体を結成した。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