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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토 준코

 
출연자들

1993년 8월 20일부터 9월 4일까지 16일 간 열린 제1회 창무국제무용예술제 『부토―세기말의 계보』 (통칭 「부토 페스티벌」)에서 일본 측의 프로듀서를 맡은 사람은 야마다 세츠코의 남편인 남상길(南相吉)이었다. 남상길은 부토에 대한 평론 활동은 하고 있었지만, 축제의 프로듀서를 맡은 적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92년에 김매자 선생님이 일본에 오시면서, 한국에 창무회 전용극장이 생기는데, 그 오프닝 이벤트로 일본 부토 페스티벌을 열고 싶다, 그 일을 맡길 사람은 너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아주 뜻밖의 일이었죠." 남상길이 놀란 것도 당연하다. 일본이나 유럽에서도 부토에 특화된 페스티벌이 열린 바는 없는데, 부토 공연의 실적이 거의 없는 한국에서 그것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김매자 선생님의 부탁이었고, 개인적으로도 한국인의 피가 끓으면서도 조국에 무엇 하나 각인을 남기지 못 했던 것에 대한 저 자신의 뜻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불안했지만 그 일을 맡기로 했어요."

남상길은 이왕이면 부토의 전체를 볼 수 있게, 가급적 다양한 부토가들을 선출하기로 했다.


 
우선은 오오노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오노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출연을 승낙해주셨고, 정말 기뻤어요. 선생님이 참여하신다면 젊은 무용가도 기꺼이 참가할 거라 생각했지요."

 
이렇게 해서, 오오노 카즈오와 그의 아들 오오노 요시토(大野慶人), 우에스기 미츠요(上杉満代), 타케우치 야스히코(武内靖彦), 조쿠초의다비(族長の足袋), 부토샤 텐케이(舞踏舎天鶏), 고이 테루(五井輝), 오오모리 마사히데(大森政秀), 야마다 세츠코 까지 총 8팀이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이미 87세였던 오오노 카즈오 이외에는 「제2세대의 부토가」로 불리는 댄서들이다. 히지카타 타츠미 형식의 부토를 계승하는 사람, 오오노의 즉흥 부토의 흐름에 속하는 사람, 또는 이미 부토라는 개념과 결별한 댄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출된 부토가들은 모두 좋아했습니다. 해외공연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도 동경과 호기심이 있던 것 같습니다. 동경이라는 말이 좀 이상할 수도 있지만,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함께, 그것을 극복한 나라에 대한 존경이라고 할까요. 당시 일본의 진보적 문화인의 대부분이 그랬죠."

멤버의 선출은 순조롭게 마쳤으나, 남상길에게는 최대의 난관이 남아 있었다. 자금 문제였다.


 
한일교류의 형태

무용가 8팀과 스태프를 해외로 파견하고, 2주간의 축제를 진행한다. 이는 과거에 유례 없는 형식이었다. 이 비용을 어디서 마련해야 할까? 김매자가 극장 건설의 동기로 들었듯이, 당시의 한국 정부에게는 지금과 같은 문화 예산이라는 개념은 희박했다. 그리고 한국인에게 익숙하기는 커녕 반감을 살 가능성마저 있는 「일본의 부토」에 한국 기업으로부터의 후원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일본의 부토뿐 아니라 당시에는 문화 예술에 관심 있는 기업은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창무국제페스티벌도 제11회까지는 정부 지원금도 없었고, 기업 후원도 없었습니다."

창무국제페스티벌의 제11회는 2003년이었다. IMF위기를 극복한 한국의 새로운 약진이 시작되는 시기. 일본에서는 『겨울연가』가 방송되어 「한류원년」으로 기억된다. 그 때쯤 되어서는 한국의 문화 예술을 둘러싼 환경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정부의 문화 예산뿐이 아니예요. 90년대에는 지금 같은 기획사도 없어서 돈도, 기획도, 춤도, 홍보도, 다 우리가 직접 할 수밖에 없었어요. 힘들었죠."

김매자는 그 상황에서 축제기간 동안의 극장 운영 경비, 참가자와 스태프의 숙박비용, 홍보비 등의 부담을 약속했다. 나머지 항공료 및 출연자의 개런티는 남상길의 책임이었다.

다행히 당시 일본은 그나마 선진국이었다. 일본 정부는 어느 정도의 문화 예산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부토는 해외 공연 부문에서의 실적이 꽤 평가를 받고 있었다.

"세츠코가 해외 공연에 초대받은 일도 있고, 정부가 지원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죠. 그러나 제가 신청을 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고 아무것도 몰랐어요. 고생이라고 하면 그것이 가장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대량의 신청서류를 작성하고,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친 끝에 참가자와 스태프의 항공료는 일본국제교류기금(Japan Foundation)로부터 전액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출연자의 개런티는 세종문화재단으로부터 300만엔, 나머지는 빠듯한 협상 끝에 시세이도(資生堂)에서 조성금 50만엔을 받아냈다고 한다.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부토가들이 제대로 작품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열심히 뛰었던 것 같아요. 다시 하라고 하면 힘들 정도로요."

남상길은 환하게 웃었다.

사족이지만 한일 교류 초기에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역할이 아주 컸다. 한국 정부나 기업의 지원이 제도적으로 갖춰지기 전까지, 공적 원조의 창구는 일본측 밖에 없었다. 그 시기 이후 한국의 예술가가 일본의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늘어났지만, 그 신뢰의 문을 먼저 연 사람은 김매자를 비롯한 한일 교류 1세대였다.

이렇게 부토 페스티벌 준비는 완료되었다. 선발 멤버와 함께 입국한 남상길은 포스트극장 스태프의 따뜻한 환영을 아주 반가워하면서도, 객석을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과연 이 객석을 얼마나 채울 수 있을 것인가? 한국 관객은 부토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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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東順子

 
出演者たち

1993年8月20日から9月4日まで16日間にわたって開かれた、第1回創舞国際舞台芸術祭『舞踏―世紀末の舞踏』(通称「日本舞踏フェスティバル」)で、日本側でのプロデュースを任されたのは、山田せつ子の夫である南相吉だった。南は舞踏についての評論活動などはしていたものの、フェスティバルのプロデュースはこの時が初めてだった。

 「92年にキム・メジャ先生が日本に来た時に、創舞の専用劇場ができるので、そのオープニングイベントに日本の舞踏フェスを開きたい。それをやるのはお前しかいないと言われました。びっくりしました」

 南が驚いたのは当然だろう。日本やヨーロッパでも舞踏に特化したフェスティバルなど開かれたことはないのに、舞踏公演の実績がほとんどない韓国で、それをやろうというのである。

 「でも、他ならぬキム・メジャ先生からの頼みだし、それに韓国の血を引きながらも祖国に何一つ刻印のようなものを印していなかった自分自身の思いもありました。それで、不安の塊ではあったけど、引き受けることにしたんです」

南が心がけたことは、どうせやるなら舞踏の全貌がわかるような企画にすること。そのために、なるべくバラエティにとんだ舞踏家を選出することだった。

 

「まずは大野先生のところに伺いました。大野先生は快く出演を承諾してくれて、本当に嬉しかった。先生が参加されるとなれば、若い舞踏家も喜んで行くでしょう。」

 
こうして、大野一雄と息子の大野慶人、上杉貢代(現・満代)、武内靖彦、族長の足袋、舞踏舎天鶏、五井輝、大森政秀、山田せつ子の8組がフェスティバルに参加することになった。当時すでに87歳だった大野一雄以外は、「第2世代の舞踏家」と言われるダンサー達であり、土方巽の形式舞踏を受け継ぐ者、大野の即興舞踏の流れをくむ者、あるいは既に舞踏というカテゴリーから決別したダンサーも含まれていた。

 
「声をかけたダンサーたちはみんな喜んでいました。海外公演ということもそうですが、韓国という国にも憧れや好奇心があったのだと思います。憧れというのはちょっと変な言い方ですが、植民地支配への反省とともに、そういうものを乗り越えた国への尊敬というか。当時の日本のリベラル文化人の多くがそうでした」

メンバーの選出は比較的スムーズに終えたものの、南には最大の難問が残っていた。資金調達である。

 


 
日韓交流の形

8組の舞踏家とスタッフを海外遠征させ、2週間のフェスティバルを行う。これは過去に例のない形式だった。この費用をどこから捻出するか。キム・メジャが劇場建設の動機で語っていたように、当時の韓国政府に今のような文化予算という概念は希薄だった。さらに韓国人にとって馴染みがないどころか反感を買う可能性さえある「日本の舞踏」に、韓国企業のスポンサーを期待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日本の舞踏に限らず、当時はまだ文化芸術に関心のある企業は少なかったのです。創舞国際フェスティバルも第11回目まで、政府からの支援金もなかったし、企業も後援もありませんでした。」

創舞国際フェスティバルの第11回目は2003年である。IMF危機を乗り越えた韓国が、あらたなる躍進を始める時代。日本では『冬のソナタ』が放映された「韓流元年」として記憶される。その頃に韓国の文化芸術を囲む環境には大きな変化があった。

「政府の文化予算だけではありません。以前はまだ今のような企画会社もなかったので、お金も企画も踊りも広報も、全部自分でやる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とても大変でしたが、そういう時代だったのです」

キム・メジャはそんな状況の中で、フェスティバルの期間の劇場経費、参加者とスタッフの宿泊費、広報費用などの負担を約束した。残りの渡航費と舞踏家へのギャランティーの支払いは南の仕事だった。

ただ、幸いにも当時の日本は若干の先進国であった。日本政府はある程度の文化予算をもっていたし、なかでも舞踏の海外公演はその実績が評価されていた。

 「せつ子が海外公演に招待されていたし、政府が支援してくれることは知っていました、でも、自分で申請手続をするのは初めてでした。苦労といえばこれば一番苦労だったかもしれません」

大量の申請書類を作成し、何度も交渉をした結果、参加者とスタッフの渡航費は国際交流基金(Japan Foundation)から全額の支援が受けられることになった。出演者のギャラはセゾン財団から300万円、不足分はギリギリの交渉で資生堂から50万円の助成を受け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

「もちろん十分とはいえませんが、舞踏家がきちんと仕事のできるような環境を用意できたかなと思っています。今、思い出してもよく頑張ったなと。もう一度やれと言われても、無理ですが」

 南は晴れやかに笑った。

 蛇足かもしれないが、初期の日韓交流にJapan Foundationの果たした役割が大きい。韓国政府や企業の助成制度が整うまでの期間、公的援助の窓口は日本側にしかなかった。この時期以降に、韓国の芸術家が日本でのプログラムに参加すること機会が増えたが、その信頼の門を開いたのは、キム・メジャをはじめとする人々だったのだと思う。

 こうして日韓舞踏フェスティバルの準備は完了した。先発メンバーを一緒に韓国入りした南は劇場スタッフの暖かい受け入れにホッとしつつも、会場を見渡して不安になった。苦労してここまでやってきたけれど、果たしてこの客席にどのくらいの人が来てくれるのだろう?

 大野先生以外の公演以外はガラガラ、なんてことになったらどうしよう。果たして韓国の観客は日本の舞踏を受け入れてくれるのだろうか?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