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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토 준코



히지카타 타츠미의 어메이징 레이스

 

제1회 창무국제무용예술제"부토―세기말의 계보"(통칭"부토페스티벌")가 1993년 8월 20일부터 9월 4일까지 16일 동안 열렸다. 유럽에 비해 부토의 인지도가 훨씬 낮은 아시아, 그것도 일본 문화에 대한 저항감이 강했던 한국에서 "부토"에 한정된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는 것은 2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봐도 아주 획기적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 측의 프로듀서 남상길은 "오오노 선생님의 공연 이외에는 객석이 텅 비면 어쩌지"라고 걱정했다지만, 사실 그보다 한국 측 주최자인 김매자의 부담이 더욱 컸을 것이다. 이번 취재를 통해서 새삼 그것을 깨닫게 되어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러한 용기 있는 개인의 선택이 쌓여서, 사회도 변화하고 역사도 움직인다.

축제의 첫날은 다음 날부터 펼쳐질 부토공연에 앞서서 부토의 창시자인 히지카타 타츠미 의 공연필름이 상영되었다. 영화 제목은 [보창단]. 1972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신주쿠에서 열린 연속 공연의 기록이었다. 이 연속 공연에는 무용가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나 일반 청년들도 많이 출연하였다. 이러한 전설적인 공연의 기록물은 일본에서도 공개된 바가 별로 없었는데, 이 때는 히지카타 부인의 호의로 특별히 해외 상영 기회를 얻었다.

한국 관객과 일본 스태프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상영이 시작되었지만 바로 이변이 전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하고 생각하는 순간 작은 목소리의 일본어가 들렸다.

"소리가 안 나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필름의 음성 부분이 사라졌던 것이다. 소리 없이 흑백의 화면만이 담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첫날부터 이게 무슨 일인지.. 불길한 예감이 들 무렵, 갑자기 어메이징 레이스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생전의 히지카타가 항상 들었다는 백 파이프의 무거운 소리가, 땅을 기듯이 꿈틀거리는 부토가들의 흑백 영상을 생생하게 부각시켰다.

그것은 마치 레퀴엠 같았다. 내일부터 새로운 부토가 시작된다.

영사기 고장이 불길하지 않았다. 축제 전야제에 잘 맞은 역전의 팡파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부토적"인 오프닝이었다.



 


 

 

 

오오노 카즈오 와 소녀들

축제에 참가한 8팀 중 톱 타자는 오오노 카즈오였다. 공연제목은 [라 알헨티나 송]. 1920년대에 활약한 스페인의 무용가 라 알헨티나는 1929년에 도쿄 제국극장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그것을 보고 감명을 받은 한 사람이 바로 당시 23세의 체육교사였던 오오노 카즈오 이었다. 그는 이 공연을 계기로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난 1977년, 라 알헨티나 는 다시 오오노 카즈오에게 강림하였다. 그때 이미 71세의 나이였던 오오노는 히지카타 타츠미의 연출로 [라 알헨티나 송]을 발표했고, 그것이 오오노의 대표작이 되었다. 이미 80년대에 유럽에서 큰 화제를 일으킨 이 작품이 일본 이외의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선보이게 된 것이었다.

이날 오오노 카즈오의 춤은 압도적이었다. 조용했던 객석이 어느덧 환희에 휩싸였고 커튼 콜은 영원할 듯했다. 오오노는 커튼 콜 때마다 다시 한번 춤추고 우아하게 허리를 꺾어 인사를 했다. 오오노도 관객도 정말 행복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라는 후일담을 전한 관객도 있었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이것이 "부토"인가? 한때 암흑 부토로도 불리던 시절의 그 암흑은 어디로 갔을까?

"한국만큼 춤이 사랑 받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고 남상영은 말한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춤을 보는 시각, 아니 즐기는 방법이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일본 스태프가 놀란 부분은 바로 관객층이 폭넓다는 것이었다.

첫날의 공연은 사전에 일찌감치 매진됐음에도 불구하고 당일 입장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좌석이 없는 관객들이 무대 바로 앞이나 통로에 몰려들었다.

그 때 맨 앞줄을 차지한 것이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이었다. 모두가 공책과 연필을 가지고, 오오노의 부토를 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무용과 학생뿐 아니라 그냥 신문을 보고 재미있겠다고 생각해서 온 중학교 1학년 남녀 학생들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필자는 너무 놀라서 일본 친구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그나저나 50명이 넘는 중학생들이 손에 연필과 공책을 갖고 무대 위의 오오노 카즈오를 쫓으면서 열심히 무언가를 쓰는 모습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사춘기 소녀들의 세계와 마주친 87세의 오오노 카즈오, 이것이 1993년 서울의 상황입니다"

첫날과 다음날 이틀 간에 걸쳐 진행된 오오노 카즈오 공연(둘째날은 오오노 요시토와 공연)은 아주 성공적이었고, 그 흥분은 서서히 확대되어, 마지막 날 야마다 세츠코의 무대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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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東順子



土方巽のアメージングレース

 

 第1回創舞国際舞台芸術祭「舞踏―世紀末の舞踏」(通称「日本舞踏フェスティバル」)が開かれたのは、1993年8月20日から9月4日までの16日間である。欧州に比べれば舞踏の認知度がはるかに低かったアジア、しかも日本文化への抵抗感も強かった韓国で、「舞踏」に限定したフェスティバルが開催されたことは、20年余りが経過した今ふりかえっても、非常に画期的な出来事だったと思う。

日本側のプロデューサー南相吉は、「大野先生以外は客席がガラガラだったらどうしよう」と心配したというが、主催者である金梅子のプレッシャーはそれ以上だっただろう。今回の取材であらためてそれを知り、深い感動を覚えた。大げさではなく、こうした勇気ある個人の決断が積み重なって、社会は変化し、歴史は前に進むのだ。

フェスティバルの初日は、翌日からの舞踏公演に先駆けて、舞踏の創始者である土方巽の公演フィルムが上映されることになっていた。フィルムタイトルは『疱瘡譚』。1972年秋から冬にかけて新宿で行われた連続公演の記録である。

この連続公演には舞踏家だけでなく、他の分野のアーティストや一般の若者たちも多数参加した。伝説のムーブメンの記録は、日本でもほとんど公開されたことがなかったのだが、この時は土方未亡人の好意で、海外上映の機会を得た。

韓国の観客と日本から来たスタッフが固唾を呑んで見守る中、上映は始まったのだが、すぐに異変が伝わってきた。スタッフがざわざわしている。小さな声の日本語が聞こえてきた。

「音が出てない…」

何かの事情でフィルムの音声の部分が消えてしまっていた。白黒の画面だけが無音のまま淡々と動いている。初日からなんということだ。不吉な予感がした時に、突如、アメージングレースが聞こえ始めた。生前の土方がいつも聞いていたというバックパイプの重厚な音が、地を這うように蠢く舞踏家たちの白黒映像をリアルに引き立てる。

それは、まるで時代へのレクイエムのようだった。明日から新しい舞踏が始まる。

機械の故障は不吉でもなんでもなく、フェスティバルの前夜祭にふさわしい逆転のファンファーレとなった。まさに「舞踏的」なオープニングだった。

 



 

大野一雄と少女たち

 8組のフェスティバル参加者のうち、トップバッターは大野一雄だった。演目は『ラ・アルヘンチーナ頌』。1920年代に活躍したスペインの舞踊家ラ・アルヘンチーナは、1929年に東京の帝国劇場でも公演を行った。それを見て感銘をうけたのが、当時23歳の体育教師だった大野一雄である。彼はこれを機にダンサーになる決意をした。

そして半世紀後の1977年に、ラ・アルヘンチーナは大野一雄に降臨する。当時すでに71歳だった大野だが、土方巽演出の『ラ・アルヘンチーナ頌』を発表、これは彼の代表作となった。すでに80年代にヨーロッパでも大きな話題となったこの作品が、日本以外のアジアでは初めて、韓国で披露されることになった。果たして、韓国の人々はこれを受け入れてくれるのだろうか。

この日の大野一雄のダンスは圧倒的だった。静まり返った会場はいつしか歓喜に包まれ、カーテンコールは永遠に続くかのようだった。大野はカーテンコールの度にまた1つ踊り、優雅に腰を折ってお辞儀をした。大野も観客も本当に幸せそうだった。「気がついたら涙を流していた」という人もいた。私は戸惑いを感じだ。「舞踏」とはこういうものだったのか。かつて暗黒舞踏と言われた時代の暗黒はどこにいったのか。

「韓国ほど踊りが愛されている国はないかもしれない」と、南相吉はフェスティバルの報告集に書いていた。なるほど、日本人と韓国人はダンスの見方、いや、楽しみ方が違うのかもしれない。さらに、私達日本のスタッフが驚いたのは、大野一雄の舞台を見に来た客層の幅広さだった。

初日の前売り券は早々と完売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当日も観客はどんどんやってきた。せっかく見たいと来た人を、追い返す無粋な人はおらず、定員を超える観客が客席の前、通路、後ろに詰めかけた。

その最前列を陣取ったのは、なんと制服姿の女子学生たちだった。みんながノートと鉛筆をもって、大野一雄の舞踏を見つめている。舞踊学科の生徒だけでなく、中には新聞を見て面白そうだと思ってきたという、中学1年生の男女もいた。

そのことを当時、私は友人に書き送っていた。

「それにしても、50名を超える中学生たちが手に鉛筆とノートを持ち舞台の大野一雄を追いながら一心にメモを取る様子は壮絶なものでした。思春期の少女たちに発する極めて霊的な気の世界に図らずとも対峙させられた87歳の大野一雄、これが90年代初頭のソウルの状況です」

初日、翌日と2日間にわたる大野一雄(2日目は大野慶人との共演)は大いに盛り上がり、その興奮は徐々に広がりを見せ、最終日の山田せつ子の舞台まで続いた。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