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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토 준코


일본에서 새로운 만남(1997년)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나 싶다.

7월 11일 밤 NHK방송을 보고 있던 필자는 깜짝 놀랐다.

"고바야시 씨!"

1990년 중반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김매자에게 일본행을 권한 '은인'을 얘기했던 지난 7월 호 마지막 부분에 고바야시가 "오래전에 직장을 떠났고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썼는데, 그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와 내 눈 앞에서 발언하고 있었다. 현재는 연구자로서 활약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소속 기관으로 메일을 보냈더니 바로 답장이 왔다.

"이토 선생 정말 오래간만이군요. 김매자 선생님도 잘 지내시나요?"

20년 만의 해후를 서로 반가워하며 곧바로 지난 호에 실린 나의 칼럼도 보냈다.

"나는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아닌데…"라고 하며 그는 쑥스러워했다.

1997년 일본정부에 초청을 받아 [한일무용비교연구]를 목적으로 일본에 간 김매자는, 고바야시의 "아무것도 하지 말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라"는 조언에 따라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눈앞에 여러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일본 영화계의 일인자, 다카노 에츠코(1929-2013)와의 만남이었다. 둘의 만남은 한편의 다큐멘터리 영화 [전통의 무희, 최승희 ― 김매자가 찾아가는 민족의 마음]을 거두었다.

최승희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들은 그전에도 제작된 바 있지만 상당수는 이 '전설의 무희'의 짜릿한 일생을 그대로 그린 것이었다. 그런데 다카노는 최승희 개인의 기구한 이력과 함께 "한국 춤이란 무엇인가"라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풀어보고 싶어 했다.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은 바로 김매자의 춤이었다. 1998년 10월 도쿄에서 열린 '한국거류민단부인부 창당 50주년 축하회'에 재일교포 친구를 따라 참석했던 다카노는 그곳에서 김매자를 처음 보게 됐다.






일본영화계의 대모, 타카노 에츠코와 한국무용

"춤이 시작된다는데 극장을 가득 메운 5천 명의 관객은 막이 올라도 계속 사담을 떠들고 있다. '이런 나쁜 조건 속에서 어떻게 공연을 하나' 마음을 졸였는데, 음악이 시작되고 조명 속의 김매자가 모습을 드러내니 그 웅성거리는 소리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김매자의 예술의 힘을 과시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김매자의 손과 발이 움직이자 나는 감동으로 꼼짝 못하게 되었다." (다카노 에츠코 저 『어머니』 p229)

이 글은 다카노 에츠코가 2000년 문예춘추사에서 출간한 수필집에서 인용한 것이다. 다카노는 이 책의 15페이지가량을 김매자와 한국 춤에 관해서 썼다. 다카노는 1961년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여 영화를 배우고, 그 뒤에는 세계적으로 영화 일을 해온 사람이다. 이렇게 영화를 창구로 하여 세계 각국의 아티스트와 교우하던 다카노였으나 한국 춤에 대해서는 아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저작에 쓰여 있다.

"다시 최승희를 보게 된 것은 내가 12세 때였다. 그녀는 이미 유명한 무용가가 되어 있었다. 장구춤은 리드미컬한 어깨의 움직임, 하늘거리는 나비 같은 아름다운 손, 요염한 시선 등 아직도 영화의 클로즈업처럼 내 뇌리에 남아 있다." (같은 책 p228)

그녀는 어린 시절, 실제로 최승희의 무용을 봤었다.

1929년생인 다카노는 지금 살아 계시면 87세이다. 고령화 사회인 일본에서 그 나이의 노인은 드물지 않지만, 실제로 최승희를 봤다는 사람은 드물다. 당시는 어린 아이들이 무용공연을 볼 일이 거의 없었을 때지만, 다카노는 마침 최승희의 스승인 이시이 바쿠의 수제자에게서 모던댄스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공연을 볼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카노에게 김매자와의 만남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다카노는 김매자를 안내역으로 한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고 했다.

김매자는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지만, 최승희에 관한 자료는 국내보다 오히려 일본에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 공부하려는 마음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북한을 선택한 최승희에 대한 언급이 오랫동안 금기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전설의 무희 최승희-김매자 찾아가는 민족의 마음]


1999년에 영화 [전설의 무희 최승희 - 김매자가 찾아가는 민족의 마음]은 크랭크인 하고 이듬해 여름에 도쿄에서 개봉됐다. 그 뒤 서울에서도 상영회가 열렸지만 필자는 참석하지 못했다. 언젠가 볼 기회가 있겠지 했는데 어느덧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야말로 꼭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인터넷에서 DVD를 찾아보았지만, 다큐 영화는 비디오 대여사이트에는 없었다. 배급사인 '이와나미 홀'에 직접 문의를 해야 되냐고 김매자에게 물어봤더니 "그 필름이라면 재팬 파운데이션의 서울사무소에 기증했다"고 하셨다. '잘됐다'고 생각하고 바로 서울사무소에 문의를 했는데 뜻밖의 문제에 부딪쳤다. 기증했다는 필름은 진짜 필름, 즉 DVD가 아니라 16밀리 영화필름이었다.

"그러면 영사기가 필요 하겠네요?"

"네 그렇죠. 극장 상영용이니까요."

김매자 본인 소개라 서울사무소 소장은 매우 호의적이었지만 필자 혼자를 위해서 영사기를 부탁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관심 있는 사람을 모아 상영회를 열기로 했다.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관심이 꽤 높아서, 올해 3월에 가진 영화 상영회에는 무용가, 교수, 언론인 등이 모였다.

영화는 매우 호평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도 최승희는 민족 전통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김매자는 그 흔적을 더듬으면서, "한국 춤의 전통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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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東順子


日本での新たな出会い(1997年)


世の中には不思議なことがあるものだ。

7月11日の夜、何気なしにNHKのクローズアップ現代を見ていた私は、思わず声を上げてしまった。

 「小林さんだ!」

1990年半ば、「人生最大の危機」を迎えた金梅子に日本行きを薦めた「恩人」。前月号の最後に、「ずいぶん前に職場が変わり消息がわからない」と書いた。その人がテレビに出て、目の前で発言をしている。現在は研究者として活躍しているらしい。さっそく所属機関にメールしてみたら、すぐに返信がきた。

「伊東さんですか! 本当に久し振りですね。金梅子先生はお元気ですか?」

20年ぶりの邂逅を喜びあい、早速、先月号の記事もお送りしたところ、少し恥ずかしいと言っていた。

「僕はそんなにカッコよくありませんし…」

それにしても、探していた人をテレビで発見するとは! 

さて、前回の続きだ。

1997年、日本で日韓舞踊比較の研究活動を行うことになった金梅子は、小林の「何も考えずに、いろんな人々に会ってみてください」という助言にしたがって、精力的に動いた。そうしたところ、目の前に幾つもの道が見えてきた。その中の1つが、日本映画界の第一人者、高野悦子(1929~2013)との出会いだった。2人の出会いは、一本の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伝統の舞姫・崔承喜――金梅子が追う民族の心』として結実した。

崔承喜を扱ったドラマやドキュメンタリーは、以前にも制作されたことはあるが、多くは「伝説の舞姫」のドラマティックな一生を、そのまま辿るものだった。ところが高野は、崔承喜自身の謎めいた個人史とともに、「韓国舞踊とは何か」という「もう一つ謎」に迫ろうとしていた。そのきっかけを作ったのは、金梅子の舞踊だった。1998年10月、東京で行われた在日韓国民団婦人部結成50周年の祝賀会、在日韓国人の友人に誘われて参加した高野は、そこで金梅子の舞踊を初めて見たのだった。



日本で映画界の代母・高野悦子と韓国舞踊

「踊りが始まるというのに、会場を埋めつくした五千人の観客は、幕が上がっても私語をやめず、騒いでいる。この悪条件の中でどうなることかと私は気をもんだが、音楽が始まり、ライトの中に金梅子さんが浮かび上がってくると、そのざわめきが水を打ったように静かになった。金さんの芸の力を見せつけられた瞬間だった、そして、金さんの手と足が動き始めると、私は感動で身動きできなくなったのである」 (高野悦子著『母』p229)

この文章は、高野悦子が2000年に文藝春秋社から出した著作から引用したものだ。高野はこの本の1章分を、金梅子と韓国舞踊への思いに費やしている。高野は1961年にフランスのパリに留学して映画を学び、その後も世界を相手に映画の仕事をしてきた国際人だ。映画を窓口にして、世界中のアーティストと交友してきた高野だったが、韓国舞踊には特別の思いがあった。著作には、その事情が書かれている。

「再び崔承喜を見たのは私が12歳の時だった。彼女はすでに有名な舞踊家になっていた。その時のチャンゴの踊りは、リズミカルな方の動き、ひらひらと舞う蝶のような美しい手、妖艶な流し目など、今でも映画のクローズアップのように、私の脳裏に焼きついている」 (同書p228)

彼女は幼い日、崔承喜の舞踊を実際に見ていたのだった。

1929年生まれの高野は、今、生きていれば87歳である。高齢化の日本社会ではその年齢のお年寄りは珍しくないが、実際に崔承喜を見たという人は少ないだろう。当時の子供には舞踊公演を見る機会などほとんどなかったはず。ところが高野は偶然ながら、崔承喜の師である石井漠の高弟からモダンダンスを習っていた。そのつながりで、崔承喜の公演を見る機会を得たのである。半世紀以上も前の話だ。

そんな高野にとって、金梅子との出会いは千載一遇の機会だった。高野は金梅子を案内役とした崔承喜の映画を制作したいと思った。金梅子は高野の申し入れを快諾した。

「最初はちょっと戸惑いましたが、でも、崔承喜に関する資料は韓国より、むしろ日本にたくさんあるだろうと考え、勉強するつもりで引き受けたのです」

金梅子がこう考えたのも、韓国では長い間、北朝鮮を選択した崔承喜について言及することがタブーだったからだ。

 



映画『伝統の舞姫・崔承喜――金梅子が追う民族の心』

1999年に映画『伝統の舞姫・崔承喜――金梅子が追う民族の心』はクランクインし、翌年の夏、東京でロードショーされた。その後、ソウルでも上映会が行われたが、筆者は参加できなかった。いつか見る機会があるだろうと高をくくっていたら、なんと16年の歳月が過ぎてしまっていた。

今度こそ、見なければならない。

まずはネットでDVDを探してみたのだが、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の常、普通のレンタルビデオのサイトにはない。配給会社である「岩波ホール」に直接問い合わせるしかないのかと思って金梅子に相談したところ、「そのフィルムならジャパンファウンデーションのソウル事務所に寄贈した」とおっしゃる。それなら話を早いと、ソウル事務所に連絡したのだが、思わぬ問題にぶつかった。寄贈したというフィルムは本物のフィルム、つまりDVDではなく、16ミリの映画フィルムだったのだ。

「ということは、映写機がないと見られませんよね」

「そうですねえ。あくまでも上映用ですから」

他ならぬ金梅子本人の紹介ということもあり、ソウル事務所の所長はとても好意的だったが、私一人のために技師を頼んで上映会をしてもらうのは忍びない。そこで、関心のある人を集めて上映会を開くことにした。周囲には声をかけたところ関心は高く、今年3月に行った上映会には、舞踊家、大学教授、ジャーナリストなどが集まった。

映画はとても好評だった。日本の植民地下にあっても、崔承喜は民族伝統を守るために、ギリギリの努力をした。金梅子はその痕跡をたどりながら、「韓国舞踊の伝統とは何か」を自らに問いかける。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