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윤용순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필름 중 신토 가네토(新藤兼人) 감독의「벌거벗은 섬(裸の島)」이라는 작품이 있다. 1961년 제2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이 작품은 일본 영화사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1950년대 접어들어 제2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던 일본 영화계는 메이지 영화사인 쇼치쿠, 도호, 도에이 등 6개회사를 중심으로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들 영화사에 전속된 감독이 역시 그 회사에 소속된 배우들을 기용해 영화를 만들면 이들 영화사가 전국 각지에 확보하고 있던 영화관을 통해 관객과 만나는 방식이었다. 이런 제작ㆍ유통 방식을 ‘블럭 부킹 시스템‘이라 불렀는데, 당시 일본 영화 산업은 이 메이저 영화사들의 독과점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당시엔 이런 메이저에 속하지 않으면 영화를 만드는 것도, 출연하는 것도 어려웠던 시기라 하겠다. 따라서 이들 메이저의 영향권에 들지 않았던, 이른바 독립 프로덕션 영화들은 제작비를 마련하기가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설사 영화를 완성했다 하더라도 극장을 못 잡아 개봉을 하기 힘든 경우도 많았다. 결국 메이저와 어느 정도 손을 잡지 않으면 완전한 의미의 ’독립‘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 실정이었다. 독립 프로덕션들이 적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만들어졌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기가 일쑤였다.

 

1950년대 초 신토 가네토 감독은 메이저 회사인 쇼치쿠에 소속된 시나리오 작가였다. 쓰는 작품마다 웬만큼 흥행이 된 편이어서 대접 받는 작가군에 속했다. 하지만 메이저에서 일한다는 건 많은 타협과 양보를 감수해야 한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자기가 쓴 작품이 흥행에 성공을 하지 못할 경우 회사로부터 불이익과 횡포를 당해야 할 뿐 아니라 흥행을 위해 자기가 원치 않은 이야기와 소재를 써내야 하기도 했다.

 

따라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상업적인 이유로 칼질 당하지 않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많은 작가나 감독의 가슴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신토 가네토를 비롯해 의식있는 젊은이 몇몇이 메이저 회사를 그만 두고 자신들만의 독립 프로덕션을 만들게 된다. 이 때 만들어진 독립 프로덕션사들은 오늘날 일본영화를 지탱하는 독립 영화계의 시조격이기도 하다. 당시 신토 감독이 설립한 "근대영화협회(近代映画協会)"라는 프로덕션은 지금도 꾸준히 영화를 제작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신토 가네토가 감독한 영화「벌거벗은 섬」은 바로 이 근대영화협회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기획에서 제작까지 일본 내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 즈음 근대영화협회도 다른  독립 프로덕션들처럼 경제적으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해체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해산을 할 때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단 한 편이라도 메이저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자유로운 영화를 만들어 보기 위해 최소한의 인력으로 스태프를 꾸리고 배우들은 거의 출연료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벌거벗은 섬」이었다. 상영에 있어서도 메이저가 아무런 관심을 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극장에서의 상영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마을회관과 같은 아주 제한된 몇 곳에서만 상영하는 자주 상영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벌거벗은 섬」은 세토나이가이(瀬戸内海)-혼슈(本州), 시코쿠(四国), 큐슈(九州)에 둘러싸인 일본 최대의 내해. 서남 일본을 거의 동서로 가로지르는 웅덩이 지대로 해수가 침투되어 형성된 곳-의 작은 섬에서 고구마를 경작하며 살고 있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물 한 모금 없는 섬에 부부는 매일 배를 저어 큰 섬으로 나가 지게로 물을 날라 와서는 경사진 고구마 밭에 물을 준다. 배로 아이들을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데려 오는 단조로운 나날을 묵묵히 일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 영화는 2시간 내내 단 한번 아이를 잃고 오열하는 엄마의 울음소리를 제외하고는 대사가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단조로운 반복의 묘사는 삶이란 특별한 것 없이 그렇게 묵묵히 살아가는 것임을, 때로는 아이를 잃는 슬픔이 있어도 또 살아가야 한다는 진실을 보여 줌으로써 진한 감동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1961년 모스크바 영화제에 출품돼 그랑프리를 받으며 세계 각 국으로 팔려 나가게 된다. 당시 모스크바 영화제에 참석했던 신토 감독은 커다란 세계 지도를 사서 영화가 팔려나갈 때마다 팔린 지역을 지도에 표시했는데 귀국할 무렵에는 지도에 체크 표시가 되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일본 내에서도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고 해외에 수출한 돈으로 새 작품을 만들게 됨으로써 근대영화협회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몇 가지 획기적인 시도를 한 영화로도 기억된다. 우선 100% 로케이션을 통해 완성했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영화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찍은 영화가 거의 없었다. 또한 배우와 스태프들은 합숙을 하면서 촬영을 강행했다. 지금이야 로케이션이 보편화 돼 있지만 당시는 메이저 회사가 소유한 스튜디오(촬영장)에서 거의 모든 영화가 완성되던 때라 흔치않은 일이었다.  

이 작품의 주연 배우였던 오토와 노부코(乙羽信子)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함께 숙식을 하면서 생활하니까 서로가 같은 동지로서 연대감이 두터워 촬영 작업이 아주 즐거웠다"고 술회했다. 어머니 역을 맡은 오토와 노부코는 아무리 짓밟혀도 꿋꿋히 살아내는 대지의 화신과 같은 이미지를 그려내 극찬을 받았다. 이 영화는 부부로 나오는 도노야마 타이지(殿山泰司)와 오토와 노부코 외에는 모두가 현지 섬에서 살고 있던 주민들이 출연하기도 했다.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신토 가네토는 비극, 희극, 멜러 드리마, 시대극 등 상업 영화의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했지만 감독으로서의 그는 여러 장르보다는 한 가지 주제에 집착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생활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성(性)과 생산, 가족 관계를 중심에 놓고 인간의 삶을 들여다봤던 것이다. 이런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메이저 영화사가 아니라 독립 프로덕션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신토 가네토의 전위적인 노력은 일본 독립영화의 새 길을 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현재 9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 감독으로서의 여생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