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임재철(서울시네마테크 대표, 영화평론가)

 

 일본은 대단히 일찍 ‘시네마토그래프’를 받아들인 나라이다. 이미 1897년에 오사카에서 프랑스에서 수입된 영화가 최초로 상영되었다. 일본 최초의 시대극이라 할 수 있는 영화들은 기존의 전통 공연예술, 이를테면 가부키를 찍어서 상영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대중적인 시대극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세계의 영화사를 보면 항상 영화가 도입될 때 영화를 가지고 상업적으로 어떻게 만들어 나가느냐에 대한 고민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기존의 장르 중 어떤 것을 모델로 하여 영화를 만들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초기의 영화 스타일이나 미학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본의 경우, 초기에 영화와의 접점을 찾을 수 있었던 장르는 일본의 전통 공연예술로, 가부키를 촬영해 대중에게 보여주었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일본 시대극 영화의 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최초로 실사 영화를 가지고 흥행을 한 회사가 요코다(橫田)상회라는 곳이다. 요코다상회는 1908년부터 상업적인 흥행을 노린 극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교토에 자리잡고 있던 이 회사는 역시 교토에서 센본좌(千本座)라는 극단을 운영하고 있던 마키노 쇼조(牧野省三)라는 사람을 초빙해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한다. 센본좌는 자주 가부키 공연을 하던 극단으로, 마키노 쇼조는 가부키 배우들을 등장시켜 영화를 만들었다. 마키노 쇼조는 초기에 그의 작품에서 당시에 연극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오노우에 마츠노스케(尾上松之助)를 출연시키고, 그 결과 마츠노스케는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마츠노스케가 출연한 영화들은 ‘마키노 쇼조의 영화’가 아니라 ‘마츠노스케의 영화’라고 불릴 정도로 대중적인 지지가 컸고, 전성기에는 1년에 80여편의 영화에 출연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당시 일본의 시대극 영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대중문학의 등장이다. 1910년대 경 이미 일본의 대중 문예라고 할 수 있는 대중소설들이 굉장히 많이 팔리고 읽히곤 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다테카와 문고라는 것이 있다. 다테카와 문고가 주로 다루었던 이야기들은 흔히 고당(講談)이라고 지칭되는 것들인데, 영웅 호걸들이 등장하는 옛날 이야기들이다. 다테카와 문고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은 마키노 쇼조가 마츠노스케와 함께 만든 작품들을 비롯하여 여러 감독들에 의해 많이 영화화되었다. 이 영화들은 그 당시에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특히 나이 어린 청소년들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보니 연령대가 높거나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마스노스케의 영화를 유치한 영화로 치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1910년대에 만들어진 마스노스케의 영화들은 초기에 일본 영화가 외국 영화보다 유치한 영화가 많다라는 생각을 일반 관객들이 갖게 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910~1920년대 일본의 영화관들은 어느 정도 거기에 맞춰 이미 계층화가 이루어진다. 즉, 상류 계층이나 지식인 계층이 선호하는 서양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과 하층계급이 주로 보는 유치한 시대극들, 일본인들이 ‘찬바라 영화’라고 부른 것들을 트는 극장으로 구분이 되어 있었다. 마츠노스케의 영화가 장사가 되자 요코다 상회와 다른 몇몇 흥행 회사들이 합병하여 1912년에 닛카츠(日活)라는 영화사가 생기게 되었다. 닛카츠는 마츠노스케의 영화로 많은 돈을 벌게 되면서 제작사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마츠노스케를 스타를 만들었던 마키노 쇼조는 자신의 작품에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던 차, 1922년에 닛카츠를 떠나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만들었다. 그 회사 이름이 마키노 교육 영화제작소이다. 마키노 쇼조가 자신의 영화사 이름에 ‘교육’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은 당시에 그의 영화가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비판을 피해 가기 위해 자신의 영화사 이름에 ‘교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가 1922년에 이 영화사에서 제작한 <실록 주신구라(實錄 忠臣藏)>라는 영화는 기존의 마스노스케의 영화의 시대를 벗어나는 제1보가 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평가를 받게 된 이유는 그 작품이 마스노스케의 영화에 나오는 양식화되고 스펙타클성은 있으나 리얼리티는 결여되었던 결투 장면을 벗어나, 스펙터클로서는 빈약하지만 기존의 영화보다 좀 더 리얼리티가 있는 결투 장면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마키노 쇼조가 이러한 다른 시대극을 만드는데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910년대 후반 일본의 연극계에서 나왔던 ‘신국극(新國劇)’이었다. ‘신국극’은 사와다 쇼지로라는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기존에 양분화되어 있던 일본의 전통에 기초한 대중적인 연극과 서양의 연극을 받아들인 서양적인 연극의 장점을 모두 살려서 대중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연극을 시도하였는데, 그 연극이 바로 ‘신국극’이다. ‘신국극’에서는 기존의 연극들에 비해 좀 더 리얼리티가 있는 결투 장면이 등장했는데, 마키노 쇼조는 바로 ‘신국극’에 나오는 결투 장면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시대극을 만들게 된 것이다.
마키노 쇼조 이후에 시대극을 만들었던 중요한 감독으로는 이토 다이스케(伊藤大輔)가 있다. 이토 다이스케는 1920년대 후반 오고치 덴지로라는 유명한 배우와 함께 <추지의 여행일기(忠次旅日記)>를 비롯한 많은 걸작들을 만들었다. 이토 다이스케는 당시의 지식인 계층들이 일본 영화도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원래 문학을 지망했던 이토 다이스케의 무성 영화는 자막과 영상을 연속시키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여 당시의 다른 무성영화와 비교해 보아도 아주 독특한 미학을 수립한 작품들이었다. 
 
영화사 초기부터 일본 시대극 영화의 중심은 교토였다. 전통적인 건축이 많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전통공예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교토는, 영화인들에게 시대극을 만들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들, 이를테면 쇼치쿠(松竹), 다이에이(大映), 도에이(東映)는 동경과 교토에 모두 촬영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동경에서는 현대극, 교토에서는 시대극을 만드는 식으로 영화제작에 있어서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일본영화의 독특한 점 가운데 하나는 영화사 초기부터 줄곧 교토에서 시대극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 영화의 중심을 결코 동경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시대극을 많이 만들었던 미조구치 겐지의 경우 아예 주거 자체도 교토였다. 따라서 일본 영화를 크게 현대극과 시대극으로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일본 영화의 중심도 동경과 교토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은 미국이나 프랑스와 비교해도 매우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극은 어느 정도 일본의 전통 예술의 기법들이 자연스럽게 영화로 전이된 측면이 있으나, 시대극이 자기만의 미학을 확립하는데 있어서 그에 못지않게 1910~1920년대 미국의 장르 영화들로부터 받은 영향도 크다는 점은 시대극을 얘기할 때 보다 강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단순히 현대극은 현대적이고 시대극은 전통적, 보수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우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1930년대에는 실제로 외국 영화들에 등장한 새로운 기법들을 잘 소화해서 시대극에 있어서 잘 구현한 감독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감독들로 야마나카 사다오(山中貞雄)와 이타미 만사쿠(伊丹万作)를 들 수 있다. 야마나카 사다오는 기존의 지배적인 시대극의 흐름을 벗어나 <단게사젠여화: 백만량의 항아리 (丹下左膳余話: 百萬兩の壺)>와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 영화의 경우 주인공이 기존의 단게사젠 영화에서처럼 비장한 이미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장함과는 거리가 먼, 시시콜콜한 문제로 걱정하는 거의 동네 아저씨풍의 인물로 등장한다. 이러한 새로운 감성은 사실 외국 영화들로부터 온 것이다.

정리하자면 일본영화사 초기의 시대극은 전통적인 공연예술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대중적인 장르였던 것은 사실이나, 단지 전통예술의 기법들만을 끌어들였던 것은 아니고 미국의 장르영화와 같은 외래적인 것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동시에 흡수함으로써 새로운 정서와 스타일을 개척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