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윤용순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 히메유리의 탑
1953년 전쟁영화로는 드물게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작품이 있다. 바로 이마이 타다시(今井正) 감독의 <히메유리의 탑ひめゆりの塔>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전쟁에 동원된 청순한 여학생들이 청춘을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아야 했던 사건을 그림으로써  당시 2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았던 일본 관객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이후 전쟁에 참여하게 된 미국은 마침내 1945년4월 오키나와(沖縄)에 상륙하게 된다. 이 때부터 오키나와에서는 8월15일 항복문서에 서명하기까지 3개월 이상 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한 명이라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던 일본군은 여학교 학생들까지 간호부대로 징집하게 된다. 이들은 수습 간호부대원으로서 탄환을 옮기거나 물을 긷는 등 잠시 쉴 틈도 없이 병사들을 돕는다. 미군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부상을 입는 여학생들이 속출하게 된다. 결국 이들이 소속된 부대는 동굴까지 밀리게 되는데 미군이 점점 죄어오자 갈 곳이 없어진 여학생들은 바다로 피하려다 미군의 총격으로 모두 사망하게 된다.

히메유리는 당시 희생된 여학생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말로 <乙姬;용궁에 사는 미녀, 오토히메> 와 <白百合;하얀백합, 시로유리>에서 따왔다. 오키나와에는 훗날 “히메유리의 탑”이 세워졌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참배하고 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청춘의 화사함과 전쟁의 비참함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면서 관객의 감정을 파고든다. 살벌한 전쟁 와중에도 여학생들이 배구를 하며 평화로운 한 때를 보내며 흥겨워하는 장면은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주인공 역을 맡은 카가와 교코(香川京子)는 청초한 이미지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는데 그녀는 나루세 미키오(成瀨巳喜男) 감독의 <어머니>, 오즈 야스지로(小津安次郞) 감독의 <동경이야기>,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감독의 <치카마츠이야기>를 비롯해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 작품에도 자주 출연했다. 지금도 여전히 활동 중인 그녀는 <히메유리의 탑>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40년이 넘는 연기 인생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작품을 꼽으라면 <히메유리의 탑>이라고 하겠다. 무더운 오키나와에서 피와 땀이 뒤범벅이 되는 전투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우리는 한겨울에 도쿄의 오픈 세트에서 매일 밤 한,두 시까지 작업하곤 했다. 히메유리 부대의 학생역을 맡은 연기자들은 그 추운 날씨에 반소매 셔츠 차림으로 떨었을 뿐 아니라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카메라가 돌아가기 직전까지 입에 얼음을 물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육체적인 어려움 외에도 감독의 엄격한 태도도 잊을 수가 없다. 출연자들은 자기가 연기하는 인물이 어떤 내력과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 작문을 해서 감독에게 제출해야했다. 귀찮았지만 결국은 그런 연습이 많은 공부가 되었다.”

 

▲ 히메유리의 탑
1937년 <누마즈병대학교 沼津兵学校>로 데뷔한 이마이 타다시 감독은 2차 대전 직전,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사실이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1942년에 만든 <망루의 결사대 望楼の決死隊>는 일본 경찰대가 조선에서 활동하는 항일 게릴라 부대를 격퇴하는 내용의 액션영화로 국민들에게 전의(戦意)를 고양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종전이 되고 난 뒤 이마타 타다시 감독은 민주주의 계몽대의 입장에 서서 학원 민주화를 주제로 한 청춘 영화를 만들거나 전쟁 중에 있었던 비극적인 연애를 그려 반전(反戦) 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히메유리의 탑>도 그런 연장선 위에 있는 작품이다.
"나는 학생 때 좌익 운동을 했는데 몇 번 경찰에 연행되고 난 뒤 전향을 선언했다. 그리고는 2차 대전 중에 몇 편의 전쟁 협력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그 일을 내가 저지른 잘못 중에서도 가장 큰 잘못일 뿐 아니라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어떤 입장을 지켜야만 하는지 오랫동안 고민하며 망설였다. 힘든 시대를 과연 동요 없이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내 자신의 약함을 알고 있기에 갈등과 망설임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히메유리의 탑’ 같은, 전쟁을 고발하는 걸작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이마이 타다시 감독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뼈를 깎는 반성과 각오를 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1912년 출생인 이마이 타다시 감독은 구로사와 아키라, 기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와는 거의 동세대였다. 동경대 문학부 재학시절 좌익운동에 참가하여 몇 차례 검거되기도 했다. 영화계에 들어오게 된 것도 영화가 좋아서라기보다 “전과자”가 취직할 수 있는 곳이 영화 회사정도였기 때문이었다.
92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동경 대공습의 비극을 그린 <전쟁과 청춘>을 유작으로 남겼다.

 

독립 프러덕션 운동에 참여하며 만든 첫 번째 작품으로 1951년 <얼씨구 살아있다 どっこい生きている>를 비롯해, 2차 대전 후 피폐한 농촌 현실을 그린 <메아리 학교 山びこ学校>등이 있다. <히메유리의 탑>도 그가 독립 프러덕션에서 왕성하게 활동할 때 제작한 영화이다. 그는 공산당원으로 사회적 문제를 많이 다루므로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