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금의「문화인 단기초빙」프로그램으로 일본을 다녀온 조영남씨는 한국의 국민적 가수. 일본에 무관심이었던 그가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를 계기로 일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 살고있는 이봉우(李鳳宇, 씨네캐논 대표)씨는 영화「쉬리」등 한국의 영화를 일찍이 일본에 소개한 프로듀서. 두 사람에게 영화ㆍ음악분야를 중심으로 한국 젊은이들의 의식과 일본과의 문화교류에 대해 들어본다.

 

조영남 氏
(李)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지금까지 활발한 활동을 해 오셨는데요, 최근의 활동내용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趙) 저는 가수로 알려져 있지만 취미로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 왔습니다. 그런데 1990년에 미술가로서 알려지게 되면서 올해 광주비엔날레에 작가로 초대되었어요. 제가 미술계에서 유명하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제 경력에는 음악하고 미술이 붙었어요. 그 다음에는 제가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몇 년 전부터 일간지에 원고를 내었고 현재 중앙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오게 된 것도 그 칼럼에서 일본을 우호적으로 쓴 것이 계기가 되었지요.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저는 노래를 불러서 돈을 벌어 그림과 글을 쓰는 취미를 가진 그런 사람입니다.
(李) 그림이 평가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趙) 미술세계에서는 독창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독자적인 것을 생각해서 30년 전에 화투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화투라는 것이 한국 사람들한테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게 미술소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걸 제가 미술 소재로 택해서 지속적으로 파고든 것이 성공의 요인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광주비엔날레 갤러리 벽면에 화투를 입체적으로 조각한 제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런 작품은 아마 처음일 거에요.

 

(李) 한국에서는 한 장르만 아니고 장르를 뛰어 넘어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趙)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필연적으로 양국에 시달린 특이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 한국인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우리네 핏속에는 비축된 게 많이 있다고 봐요. 그것이 표출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백남준 씨 같은 걸출한 아티스트가 중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에서 탄생했잖아요. 특이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특이한 DNA가 생겨 백남준 씨 같은 특이한 인물이, 왜 특이하냐면 중국에서도 앞으로 백남준 씨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없고 일본에서도 그런 아티스트가 나올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가 중국이나 일본의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정말 한국인에게 그런 케이스가 많다고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李) 미술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겠지만, 조영남씨의 다양한 활동에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경험같은 게 있나요?
(趙) 결국은 제가 살고 있는 하루하루의 삶이 내 음악을 구축하고 미술을 구축하는 거겠죠? 저는 특이하게 한국에서 태어나 일찍이 미국 문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제가 후회하는 게 있다면 내가 일본의 문명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는데 왜 그 긴 세월을 미국 문명속에서만 살았는가 하는 점이에요. 동양인으로 태어나 일찍이 미국 영향을 받아서 내 문화 개인의 컨텐츠가 미국적인 컨텐츠가 되어 어중간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도 아닌 그렇다고 미국도 아닌 그런 것이 지금 저의 상태입니다. 제가 벌써 60년 정도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일본의 문화를 많이 흡수해서 다시 토해낼 수 있으면 하는 게 제 희망입니다.

 

 

국제적으로 평가받게 되어

 

(李) 대학을 졸업하신 후 가수 활동을 먼저 하셨죠?
(趙) 네. 대학에서는 성악을 전공했어요. 클래식을 했었지만, 이 얼굴과 키로는 베르디의 니골레트 역할밖에 못할 것 같더라구요. 주인공이 이런 얼굴이면 역시 무리일 것 같아 (웃음) 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찾은거죠.
(李) 먼저 가수활동을 오래 하셔서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현재 한국의 음악 사정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趙) 현재 음악사정은 당시와 비교하자면 많이 발전한 정도가 아니에요. 많이 발전하긴 했는데, 미국과 유럽의 영향을 받아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거에요. 젊은이들 사이에서 미국의 힙합, 펑크록 등 이런 음악을 수입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 따라하지만, 컬리티가 자연히 많이 떨어지죠. 새로운 음악도 새로운 미술도 결국은 큰 나라의 영향을 받게 되니까 독자적인 것을 많이 못하는 형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와 보니「겨울연가」붐이 일어 한국의 것이 일본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인으로서는 어떤 의미에서 충격적이었어요. 어! 우리가 해도 되는구나. 앞으로 우리도 잘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단계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김기덕 감독이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자기의 실력으로 상을 받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자각하기 시작하는 단계인 것 같아요.

 

(李) 최근 한국 영화가 국제적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영화 관계자들이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음악분야는 영화와 비교해 어떻습니까?
(趙) 한국 음악은 아직 인터내셔널한 코드가 굉장히 협소한 것 같아요. 한국 음악이 일본이나 미국의 젊은이들한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영화보다 훨씬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영화는 이미 같은 코드를 갖고 있고 또 현대 미술도 상당히 빠를 수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음악은 많이 뒤쳐지죠.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아직 음악은 성숙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타이밍이 절묘한 지금

 

이봉우 氏
(李) 조영남 씨는 영화에도 출연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영화에 출연하셨을 때의 상황과 지금 영화계는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십니까?
(趙) 변한 정도가 아니지요. 지금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됐어요.「쉬리」를 시작으로「태극기 휘날리며」,「박하사탕」, 김기덕 감독의「사마리아」등 새로운 시대의 영화지요. 임권택 감독이 등장한 이후를 새로운 시대라고 저는 봅니다. 영화계에서는 자연히 새로운 파, 흐름이 형성되어 현재는 김기덕, 강제규 같은 젊은 감독들의 시대가 되어 있습니다.
(李) 저는 지금까지 한국영화를 많이 보았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쉬리」나「JSA」도 그렇고 여러 영화가 있습니다만, 임권택 감독의 영화「서편제」를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처음으로 일본에 배급한 한국영화가「서편제」거든요. 1994년에「서편제」를 봤는데 그때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판소리 영화를 처음 봤거든요. 역시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분단의 비극이랄까,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아픔”, 그런 걸 굉장히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제가 한 스물 서너 편 한국 영화를 배급해왔는데, 한국 영화에는 연륜 같은 것이 저변에 깔려있지 않은가 생각해요.「쉬리」도 그렇고 또「JSA」도 그렇구요. 최근의「태극기 휘날리며」도 그렇고「실미도」도 그렇다고 봅니다. 그러한 변하지 않는 테마, 표현이 패턴으로서 존재하고 있지요. TV드라마「겨울연가」에도 영화와 공통된 이런 테마가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영화나 드라마의 인기를 어떻게 보십니까?
(趙) 저는 타이밍이라고 봐요. 한국과 일본이 절묘하게 타이밍이 맞아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서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인정받고 그러는 것, 즉 서로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인정받은 것에 자극받아 한국에서도 급격하게 국제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저부터도 벌써 일본에 와서 충격을 받았으니까 말이지요.
근데 문제는 아직도 미국은 멀고, 너무 크고, 중국은 너무 가까운데 닫혀 있지요. 지금 우리가 공략을 해야 될 때인데, 그게 바로 일본이지요.

 

 

영화를 계기로 가까운 존재로

 

(趙) 한국에서 일본까지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마치 버스타고 서울에서 대전에 가는 기분입니다. 이렇게 가까운데도 멀게 느낀 건 한일 관계의 역사적인 과오이지요. 숙명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렸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어령 씨의「축소지향형 일본인」이나 전여옥 씨의「일본은 없다」같은 책을 보며 일본은 조그만 걸 추구하는 국민으로 인식했지요. 한국사람은 벌써 이 십년 전부터 일본은 그냥 사소한 나라, 우리가 우습게 봐도 되는 나라로 굳어진 것이 문제입니다. 소수 지식인이 얘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해 버린다는 건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것도 문화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잘못된 문화지요. 일본에 대한 인식을 다시 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李) 일본 사람들도 최근 한류 붐이 없을 때에는 한국 영화에 대한 지식이 없었어요. 제가 굉장히 놀란 건「쉬리」라는 영화를 배급하면서 인터넷에서 의견 등을 봤을 때 인데요, 특히 젊은층들이 한국이 북한과 같은 민족이었다는 걸 몰랐던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또 평양이 중국의 한 도시로 알고 있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한국을 보니까 일본하고 거의 비슷하다 등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어쨌든「쉬리」나 다른 한국 영화를 계기로 젊은이들 사이에 한국이 가까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매우 놀라운 사실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매우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趙) 그렇죠. 모르면 그냥 모르는대로 사는 건데, 이제 알고 나니까 눈이 뜨이는 거지요. 그래서 교류라는 게 새록새록 폭이 넓어지는 거지요. 이봉우 씨하고 제가 지금 이렇게 있는 것도 좋은 시대를 만나서 그런겁니다.

 

(李)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는 앞으로도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분야의 교류가 가장 빨리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趙) 저는 음악이 제일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류라는 말이 참 애매해요. 원래 문화에는 교류라는 말은 없는 것 같아요. 문화라는 건 서로 좋아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주거나 받는 것이 아니지요. 예를들어 보아가 노래를 잘 하니까 일본에서 받아들여 졌고, 영화를 예로 든다면 필름을 서로 교환해서 문화교류를 하는것도 아니지요. 또 갑자기 합작 영화를 만들자고 해서 교류가 되는 것도 아니구요.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몸담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여 작품을 잘 만들면 결과적으로 교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이 볼 만한 그림을 제가 그리는 것이나, 일본에 와서 공부한 것을 살려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면, 그게 자연히 문화교류를 하는 게 되는 거지요.

 

사진촬영 : 高木厚子

遠近(wochi kochi) 제2호(Dec.'04 / Jan.'05)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