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오오이 고이치(마이니치신문 학예부 기자)

 

보통의 일본인에게 있어서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1979년『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群像)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그로부터 4반세기 이상에 이르는 집필활동을 거쳐 세계 30개 이상의 언어로 작품이 번역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라카미 씨는 일본 문학계 전방에서 계속 존재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이미 상식에 불과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잠시 멈추고, 그러면「작가ㆍ무라카미 하루키」는 요사이 단지 똑같은(단조로운) 존재로서 이어진 것일까. 예를 들어「인기작가」「베스트셀러 작가」와 같은 식의 표상으로 수용되어져 온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재차 질문 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문학비평에 있어서 이 과정이 복잡한 평가의 음영을 동반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문학 그 자체와는 조금 떨어진 관점에서 생각하고 싶다. 즉 반드시 문학애호자는 아닌 지극히 평범한 동시대의 일본인들에게 있어「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떤 존재일까. 이에 대해 문예지 등의 전문 미디어를 제외한 일반 신문ㆍ잡지에서의 채택 방법, 이를테면 미디어에서의 표상의 변천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그럼으로써「무라카미 하루키와 그 시대」의 일부분을 대략 그려보고 싶은 것이 이 글이 노리는 바이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여기에서는 미디어에 표상된「무라카미 하루키」상(像)을 다음 5개 정도의 시기로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제1기는 79년에 데뷔한 때부터 84년까지, 제2기는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상을 수상한 85년부터 대히트를 친『노르웨이의 숲』이 간행된 87년까지, 제3기는 88년부터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한 96년까지, 제4기는『언더그라운드』가 간행된 97년부터『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가 간행된 2000년까지, 그리고 제5기가 2001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1)

 

조용한 데뷔
일반지에 무라카미 씨가 처음 등장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79년 제 22회 군조신인문학상 수상보도가 최초이다.(2) 이 상의 선고위원회는 4월 9일에 열렸는데,『산케이신문』은 빠르게도 다음날 10일자 조간에서 이 사실을 보도했다. 자그마한 1단기사로, 흔히 말하는 베타기사였다. 다른 신문사도 같은 기사를 수일 후까지 게재하였다.(3) 일반지상에서는 다른 많은 신인작가들과 다름없이 작은 한걸음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때 신문에서는「자영업」이라고만 적혀있던 직업에 주목한 잡지가 있었다.「군조신인문학상=무라카미 하루키 씨(29세)는 레코드 3천장을 소유한 재즈까페의 주인」이란 타이틀로 2페이지를 할애해 인터뷰 기사를 게재한『주간 아사히』(같은 해 5월 4일자)이다. 가득 찬 레코드 선반 앞에 선 무라카미 씨의 사진을 덧붙이며「별종 작가들이 속출하는 현대문학의 풍경 중에 또 다른 한명의 이색 신인이 등장했다」라고 쓰여져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무라카미 씨는 2년 후인 81년 전업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다. 이 시점의 소설은『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의 핀볼』두 작품 밖에 없었으나 이미 야마모토 사부로(川本三郎) 씨,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 씨, 쓰키무라 도시유키(月村敏行) 씨 같은 비평가들은 무라카미 씨의 독자적인 작풍에 주목했으며, 젊은 문학 팬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기 시작했다. 아직 일반지 기사로 다뤄지는 일은 적었으나,『아사히신문』(80년 5월 17일자 석간)은「젊은 세대에게 잔잔한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표제)라는 시의적절한 작은 인터뷰를 게재하고 있다.『아사히』는 같은 해 11월 12일자 석간에 무라카미 씨의 기고문「피츠제랄드의 매력」을 게재한 것도 주목을 끈다.

 

문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소설가
다음으로 일반지에 보도된 계기가 된 것은 82년 제4회 노마(野間)문예신인상의 수상이다. 수상작은 세 번째 장편『양을 쫓는 모험』(「군조」8월호. 단행본은 10월 발간). 다만 12월에 치러진 증정식 관련 기사에서는 같은 시기 노마문학상을 받은 고지마 노부오(小島信夫) 씨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 지금 보면 의외라는 생각도 든다. 한편 이 즈음 무라카미 씨의「독특한 라이프스타일」에 관심을 가진 기사가 있어 눈에 띈다.
예를 들면『산케이』(83년 2월 20일자 조간)에서는, 무라카미 씨가 당시 살고 있던 치바(千葉)현 후나바시(船橋)시의 자택을 기자가 방문하여, 뒷마당을 파내고 메우는「구멍파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를 다루고 있다. 또 같은 해 5월 1일자『마이니치신문』조간에서는,「텔레비전도 차도 없고 해외에도 나가지 않는다」「기교적인 생활을 즐기는 작가」(표제)로서 무라카미 씨를 묘사했다. 이 두 개의 기사를 읽고 독자들이 납득했을 만한 인물상에는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기대되는 젊은 작가」「문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소설가」라는 표현으로 젊고 유망한 작가라 평가되어지는 게 공통점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아사히 저널』(84년 5월 25일자)의 연재 인터뷰 시리즈인「젊은이들의 신(神)들」(제7회)에 무라카미 씨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 시리즈는 동지 편집장(현 뉴스캐스터)인 치쿠시 데쓰야(筑紫哲也) 씨가 진행하는 인기 기획이었다. 그런 만큼 이 기사는 필시 보통의 일본인, 특히 문학애호자에 그치지 않고 폭 넓은 젊은 층 사이에서「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미지를 정착시키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5페이지에 걸친 긴 인터뷰에서 무라카미 씨는, 전투체험 등 치쿠시 씨가 깊이 추궁하는 질문에 세심하게 응하고 있다.「70년에 나름대로 투쟁의 뒷수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라는 발언은 흥미진진하다. 무라카미 씨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사진도 넉넉하게 싣고 있다. 그가 고양이를 안고있는 모습이나「매일 10킬로미터를 뜁니다」라는 캡션이 달린 달리는 풍경, LP레코드와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져 있는 방 등「무라카미 하루키」를 이야기하기 위한 친밀한 아이템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 『아사히 저널』(84년 5월 25일자)의「젊은이들의 신(神)들」. 당시 편집장이었던 치쿠시 데쓰야 씨가 각계의 신진 크리에이터를 인터뷰하는 시리즈로,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등장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붐」의 도래
여기까지가 처음에 서술한「무라카미 하루키」상의 제1기에 해당한다. 85년 제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수상(「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을, 이어 제2기의 시발이 된 것은 이 후 무라카미 씨가 일반 신문과 잡지에 등장하는 수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남은 지면수가 얼마 되지 않아서 이하는 간단히 서술하겠지만, 하나의 화제성은『도쿄신문』(85년 9월 26일자 조간)이 보도한 대로 무라카미 씨가 이 상을「전후 출생자 중 처음으로 수상」한「젊음」이었다.
일반인의 눈에는「젊은이들의 지지가 높은 오랜만에 등장한 잘 나가는 순수문학 작가」(「산케이9월 25일자 석간)가 중견작가의 수작에 주어지는 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성인=문단」에도 실력이 높이 평가되었다는 증거로 비춰졌을 것이다.「도회적이고 세련된 감성의 작풍」(「아사히10월 20일자 조간)이 확 와 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이사 귀신」이며「강연 의뢰나 텔레비전, 라디오, TV광고 출연은 일체 거절」(「도쿄10월 5일자 석간)하는 개성에 매우 흥미로워 했을 것이다.
굳이 도식적으로 말하자면「열광적인 팬들」(「마이니치11월 18일자 조간)의 주위에 다양한 관심을 기울이는 층이 늘어남에 따라「무라카미 현상」은 그 준비를 완료한다. 이것이「무라카미 하루키 붐」(「마이니치88년 12월 19일자 조간) 으로 꽃을 피우는데,『노르웨이의 숲』간행 후의 제3기에 해당한다. 이후 무라카미 작품은 베스트셀러의 단골손님이 되어 그 인기 자체가 사회현상으로서 분석되어지게 된다.「하루키ㆍ바나나 현상」이라던가「더블 무라카미」라는 단어가 저널리즘에서 소비되어지지만, 분명하게 할 점은 정작 무라카미 씨 자신은 이런 일련의 소란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시기의 태반을 구미에서 체재해가며 진지하게 집필 활동을 진행시키고 있던 것이다.
그런 무라카미 씨가 95년 한신 대지진과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을 계기로 귀국을 결심하여,「연관이 없는 것에서부터 연관이 있는 것으로」의 전환을 이룬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것이 하나의 형태로 나타나 일반인에게도 충격을 준 것이『언더그라운드』이후의 논픽션 작품을 중심으로 한 제4기 작업이다. 그리고 21세기인 현재 무라카미 씨는 과거 일본의 작가 어느 누구도 경험한 적이 없는「세계성」안에 서있다. 이 상황의 신선함은『해변의 카프카』(2002년)가 구미ㆍ아시아 각지에서 불러 일으킨 반향을 전하는 최근 수년간의 보도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요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 핀볼』『양을 쫓는 모험』『중국행 슬로보트』『캥거루 날씨』『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노르웨이의 숲』『댄스 댄스 댄스』『태엽감는 새 연대기』『언더그라운드』『해변의 카프카』『도쿄기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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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러한 시대 구분은 미디어 표상으로서의「무라카미 하루키」상에 관한 것으로, 무라카미 씨의 문학활동 그 자체의 구분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2) 이하에서 인용한 신문ㆍ잡지 기사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눈에 띈 범위의 기사에 한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간과한 것도 많다고 생각되므로 너그러운 이해를 구한다. 또한 집필과 관련해서는 마이니치신문 정보조사부의 기사자료를 참고했다. 감사의 뜻을 전한다.

(2)신문기사에서는 수상자 이름이「村上春紀」로 쓰여져 있었다. 수상작을 게재한『군조』(같은 해 6월호)에는「村上春樹」로 되어 있는데, 사정은 명확하지 않았으나 극히 일시적으로 필명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덧붙이자면「春樹」가 본명이다. 이 상은 그 해에 평론부문은 당선작이 없이, 당선된 우수작 2점이 도미오카 고이치로(富岡幸一郞), 우노 구니이치(宇野邦一)라는 둘 다 모두 비평가로서 후에 활약할 사람이라는 것도 포함하여, 주된 팬들에게는 주지할 만한 일일 것이다.

 

遠近(wochi kochi) 제12호(Aug./Sep. 2006)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