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적 여배우'란 무엇인가. 국가와 사회의 무엇을 표현하는가. 영화에 대한 폭 넓은 연구를 해온 요모타 이누히코 씨와 오랜 기간 아시아·중동 영화를 소개해온 이시자카 켄지 씨, 그리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영화 비평으로 잘 알려진 사이토 아쓰코 씨가 각국의 ‘국민적 여배우’를 생각해보았다.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 메이지가쿠인(明治学院)대학 교수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로 영화사를 가르치면서 영화, 문학, 만화, 도시론 등 폭 넓은 영역에서 비평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영화사(映画史)로의 초대』『모로코 유배』. 최근 저서로는 『인생의 걸인』

 

이시자카 켄지(石坂健治) 도쿄국제영화제 아시아부문 디렉터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영화학 전공. 1990~2007년, 일본국제교류기금 전문원으로서 아시아·중동영화제 시리즈를 담당. 07년 7월부터 현직. 메이지가쿠인대학, 와세다대학 등에서 아시아 영화론을 강의. 공저 『영화 속의 천황』, 최근 저서 『어떤 기록영화 작가의 궤적-쓰지모토 노리아키(土本典昭)와의 대화』 등

 

사이토 아쓰코(斎藤敦子) 영화평론가
나라(奈良)여자대학 사회학과 철학전공 졸업. 파리에서 영화편집을 공부. 귀국 후 프랑스영화사의 선전부 근무를 거쳐 영화평론가·자막 번역가로 활약. 주요 자막 작품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베라 드레이크』, 저서에 『시네마메모와르(cinemamemoire)』(피에르 브롱베르제 저), 『세계의 영화 로케지 대사전』(토니 리브스 저) 등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恵)는 ‘붉은’ 시리즈로 중국의 국민적 여배우가 되었다

 

요모타 다음은 중국으로 넘어갈까요.
이시자카 중국영화에는 몇 차례의 황금시기가 있었는데, 역시 30년대 상하이 영화를 필두로들 수 있습니다. 완령옥(阮玲玉)이라는 전설적인 대여배우가 있었습니다. 작품에서 새로운 여성의 삶을 연기할 기회가 많았고, 그로 인해 당시 발흥하던 저널리즘의 희생물이 되어 종국에는 그러한 확집(確執)속에서 자살하고 맙니다. 이러한 사실과 항일운동 시기의 여배우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상징적 존재로서 오늘날까지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요모타 노신(魯迅)이 울면서 추도문을 썼다는 유일한 여배우일 정도이니까요.
이시자카 91년에 홍콩에서 전기영화 『완령옥』이 장만옥(張曼玉) 주연, 관금붕(關錦鵬) 감독으로 제작되는 등, 중화권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현재 중국에서는 국가나 국민이라는 의식보다는 좀 더 큰 활동을 하고자 하는 배우나 감독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세계적’이라든지, ‘국제파’라는 이미지입니다. 예를 들어 『게이샤의 추억』이라는 2005년도 미국영화에서, 중국인 장쯔이(章子怡)가 일본인 게이샤 역할을 맡았습니다. 구미인들이 보면 잘 모르겠지만, 모모이 가오리(桃井かおり) 등 일본 여배우가 조연입니다. 저는 분개했습니다만(웃음).
요모타 가설입니다만, 한 시기에 중국의 국민적 여배우는 야마구치 모모에였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대혁명 이후 가족의 개념이 붕괴되었을 때, 시청률이 89%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붉은’ 시리즈를 시청했습니다. 야마구치 모모에와 우쓰이 켄(宇津井健)의 부녀간의 애정이야말로 이상적으로 여길만한 가족이라는 연구발표가 있을 정도입니다.
공리(鞏俐)를 중국의 모모에라고 부르거나, 한 때 중국의 모든 장르에 ‘○○의 모모에’가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여성 생리용품에 안네 프랑크 이름을 사용하지만, 중국에서는 모모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유일한 국민적 여배우가 있었다고 한다면 야마구치 모모에가 아닐까 합니다.
이시자카 야마구치 모모에는 『이즈의 무희』를 비롯해서 주연영화는 문학작품의 리메이크 노선이었던 것에 반해 가수로서는 매우 도전적이었다고 할까요, 아방가르드 노선이었습니다. 출생을 포함하여 요코스카(横須賀)나 요코하마(横浜)와의 미묘한 관계까지 노래에 담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야마구치 모모에는 상당히 양가적인 존재입니다만, 중국에서는 문화혁명 이후 국민적 히로인으로 등장했던 것입니다. 중국인들에게 듣자면 같은 시기에 요시나가 사유리(吉永小百合)의 영화도 꽤 들어왔었는데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고 합니다.
요모타 공리는 어떨가요. 국제적으로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인데요.
이시자카 데뷔작인 『붉은 수수밭』이후, 장예모(張芸謀) 감독과의 작품에서는 씩씩하게 살아가는 농촌 여성 역할이 많았고, 그런 의미에서는 국민적 여배우 이미지에 들어맞습니다. 단지, 중국의 경우는 중국 국내에서 어느 정도의 관객이 관람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모타 공리에 대해서는 일본, 미국을 포함한 해외의 평가와 중국 국내의 평가에는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데요. 왜냐하면 공리를 모르는 중국인이 상당히 있습니다. 공리의 초기 작품 대부분은 장예모나 첸 카이거(陳凱歌) 감독의 영화였기 때문에 중국 내 상영이 금지되었기 때문이죠.
이시자카 레이 초우(周蕾)는 『원시적 열정(Primitive passions : visuality, sexuality, ethnography, and contemporary Chinese cinema)』(이산)에서 중국 서북부 농촌을 무대로 한 일련의 영화군, 구체적으로는 『붉은 수수밭』이나 『국두』 등 입니다만, 이런 영화는 중국의 프리미티브(원시적)한 면을 해외용으로 번역하여 그렸다고 논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이런 작품들은 공리의 대표작임과 동시에 해외에서 절찬 받은 중국영화이기도 합니다.

 

가난 속에서 스타가 된 필리핀의 노라 아노르(Nora Aunor)

 

요모타 동남아시아는 어떤가요.
이시자카 각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흥미로운 예를 보자면, 필리핀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스타들 대부분이 혼혈이고, 쌍꺼풀이 있으며 코가 높고 윤곽이 뚜렷한 유럽계 얼굴을 한 사람들이 스타의 자리를 계속해서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보기 드문 예외가 노라 아노르입니다. 그녀는 혼혈이 아니며 언뜻 보아도 필리핀 네이티브의 얼굴입니다만,  국민적 여배우는 바로 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녀시절에 가수로 데뷔해서 많은 영화에 출연했는데, 국민적 여배우라는 주제를 생각해볼 때 중요한 두 작품을 들자면, 첫 번째는 76년 작 『신이 없는 삼년간(Three Years Without God)』으로, 일제시대에 일본군 장교와 결혼한 현지 여성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8월15일에 일제 협력자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폭력을 당해 머리카락을 잘리는 섬뜩한 장면이 나옵니다. 일본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비극을 맞게 되는 수난자 역할입니다.
두 번째 작품은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가 영화진흥기금을 운영하던 시기이던 82년에 만들어진 『기적의 여인』이라는 영화입니다. 지방 한촌(寒村)에 사는 평범한 여성이 우연한 계기로 영매(靈媒)가 되어가는 이야기로,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긴 줄이 생길 정도의 영매를 연기하고 있습니다.
요모타 평론가들의 예술적인 평가가 높은 편입니까. 아니면 대중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시자카 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기적의 여인』 교주라고 부를 정도의 존재입니다. 많은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를 만난 적이 있는데 조용하고 아담한 체구의 여성으로, 역할의 강렬한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가난 속에서 태어나 천부적인 노래 재능으로 톱스타의 자리에까지 오른, 이른바 ‘필리핀 드림’의 스타 탄생 스토리를 실제로 이룬 인물이니 만큼 특별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통합의 상징이 된 크리스틴 하킴(Christine Hakim)

 

요모타 그러면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어떻습니까.
이시자카 태국의 경우, ‘국민적 여배우는 이 사람’이라고 단언하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만, 리메이크되는 이야기라는 관점으로 보면, 요모타씨가 연구하시는 ‘메 나크 플라카농(Mae Naak Phrakhanong)’ 은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기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산욕열로 죽은 후에 유령이 되어 전장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의 이야기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우게츠 모노가타리(雨月物語)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메남의 석양(Khu Kham)』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도 일본인 장교와 결혼한 방콕 여인의 비극으로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었습니다. 특히 친타라 수카파타나(Chintara Sukapatana)는 이 영화로 스타가 되었습니다. 필리핀의 『신이 없는 삼년간』도 그렇고 일본인이 등장하는 이런 내용의 영화는 아시아 각지에서 종종 제작되었습니다.
요모타 『메남의 석양』은 생각하기에 따라 매우 위험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군요. 외국인, 그것도 침략자인 군인과 정을 나눈 여성의 이야기이므로 관객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역할을 하고 국민적 여배우에 오른다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역사적인 것을 포함한 상당히 테마틱한 영화이까요.

크리스틴 하킴(좌) -  Eros Djarot 감독의

『T JOET NJA’DHIEN』(1988년)에서는 19세기후반에서 20세기초반까지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였던 아체의 영웅적 여성을 연기했다.
사진제공: Christine Hakim Film - Ekapraya


이시자카 인도네시아에서는 크리스틴 하킴입니다. 국민적 여배우, 국가적 여배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70년대는 아이돌이었고, 일본의 모모에와 도모카즈(友和) 커플과 같은  존재로 슬라멧 라하르조 (Slamet Rahardjo)라는 남자배우와 함께 『첫사랑』과 『모기장 뒤에서』라는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점차 작품을 선택해서 출연하게 되었고, 80년대에 인도네시아 영화계가 침체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독립영화 계열의 자롯(Djarot) 형제가 감독한 영화에 출연하는 등으로 특화시켜 갔습니다. 88년 작 『Tjoet Nja' Dhien』은 그녀의 절정기 작품으로, 수마트라섬 북부의 이슬람 신앙이 강한 지역으로 알려진 아체에서 일어난 반(反) 네덜란드 전쟁의 여성 지도자 이야기입니다. 미묘한 것은 아체전쟁을 그리고 있는데, 그와 동시에 인도네시아의 여명이라는 국민통합적 메시지도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요모타 네덜란드와의 투쟁을 끝까지 싸워내었다는 의미겠지요.
이시자카 아체의 여성 지도자 역할을 해서 인도네시아의 국민적 여배우가 된 것입니다. 최근에는 문화대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82년에 일본 국제교류기금이 ‘남아시아 영화제’를 개최했을 때, 『유랑』이란 작품의 주연을 맡은 그녀를 처음 일본에 초청했는데 그때에도 “개발도상국의 여배우는 유명해진 후에 사회활동까지 해야 비로소 제 몫을 하는 것이다”라는 발언을 했었습니다.
요모타 좋은 의미의 전형적인 국민적 여배우라고 할 수 있겠군요.

 

「をちこち」제21호(Feb./Mar.'08)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