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무라 모모코(中村桃子)◎===========================================

간토가쿠인대학(関東学院大学) 교수.

언어와 젠더, 아이덴티티의 연관성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언어와 젠더』,『여성어』(야마카와키쿠에상(山川菊栄賞) 수상),
『<성()>과 일본어-언어가 만드는 여성과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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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調理場はそうぞうしいから、どうせ聞こえやしないわ」

(조리실은 시끄러우니까 어차피 들리진 않을 거예요) 라라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それに、かね鐘が鳴るまで給仕人がしら頭は来ないでしょ。やきもきすんのはやめなさい」
(게다가 종이 울릴 때까지 급사장은 오지 않을 테니 안절부절 하지 말아요)

이것은 영화 ‘황금나침반’(크리스 웨이츠 감독)의 주인공인 라라 벨라쿠아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12살의 초등학교 6학년생이지만, 상당히 여성스럽고 어른스럽게 번역되어 있다. 일본 초등학생의 말투와는 매우 다르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요즘 일본인이 자주 쓰지 않는 전형적인 ‘여성어’를, 영어를 말하는 12살 소녀의 입에서 듣게 된다. 리라 만이 아니다. 현재, 가장 전형적인 ‘여성어’를 말하는 사람은, 일본 여성이 아니라 번역 안의 외국인 여성인 것이다. 왜 이러한 일이 생기는가.


*집단을 표현하는 말투가 번역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들이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에는 말하고 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 만이 아니라 자신은 어떤 사람이며, 상대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또는 대화에 나오는 제삼자를 어떤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는가 등, 대화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의 인물상도 전달한다. 이것이 언어행위가 아이덴티티를 형성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 때 이용되는 것이 특정 집단의 아이덴티티와 결합된 말투이다. 일본어에서는 「わたしお腹空いたわ」는 <여성>, 「おれ、腹減ったぜ」는 <남성>과 연결되어 있다. 성별만이 아니다. 우리들은 다양한 연령, 직업, 출신지역, 계급집단을 나타내는 말투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이를 이용하여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초등학생이 쓸 것 같지 않은 ‘들리진 않을 거예요’가 12살 라라에게 사용되었는가.
그 이유는 ‘여성은 여성어로 말한다’는 믿음이 번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가인 오시마 카오리(大島かおり)씨는 “여성어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해도 몸에 밴 ‘여성스러움’이란 규범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려 언어 선택을 스스로 규제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 한가지 이유는 우리들이 ‘들리진 않을 거예요’의 저편에서 라라의 영어 목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이란, 비일본어적 목소리에 일본어 목소리를 덧입히는 작업이다. 번역 후의 텍스트에는 원문과 번역이라는 두 가지 목소리가 공명하고 있다. 우리들이 초등학생스럽지 않은 ‘여성어’를 부자연스럽게 느끼지 않는 것은, 12살 소녀의 목소리를 동시에 듣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번역이 아이덴티티와 결부된 일본어의 영향을 받는 작업이며, 번역 전의 ‘목소리’로 인해 그 부자연스러움이 해결된다고 한다면, 번역이야말로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일본어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소녀들이 아무도 ‘여성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라라와 미니마우스가 ‘여성어’를 보존해 주기 때문이다.


*왜 백인은 ‘표준어’를 말하고, 흑인은 ‘방언’을 말하는가*

번역의 이러한 작용이 우려스러운 편견을 낳는 경우도 있다. 이전에 번역된 외국문학을 읽어보면, 백인이 아닌 등장인물은 어느 지방 말인지도 알 수 없는 ‘유사방언’을 사용했던 것을 알게 된다. 1950년대에 일어로 번역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백인은 ‘표준어’이지만, 흑인은 「いんや、駄目でごぜえますだ。この前の園遊会のときには、(中略)あんなぶざまなことを仕出かしたではねえだか(아니요, 안됩니다요. 일전에 연회 때는 (중략) 그런 망측한 일을 저질렀잖아유) 」라고 말한다. 왜 이렇게 구분해서 사용하게 되었을까.
‘방언’이란, 메이지시대에 ‘국어=표준어’를 성립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교육을 받은 일본인’의 언어를 ‘표준어’로 삼고, 그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 이외의 말을 부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우수한 표준어’와 ‘열등한 방언’이라는 차별적 구별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백인은 ‘표준어’를, 흑인은 ‘방언’을 사용하는 것은 ‘우수한 표준어/열등한 방언’이라는 구별을 통하여 <백인/비백인>이라는 구별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수한 표준어’와 ‘열등한 방언’을 백인과 흑인으로 구별해 사용하는 것은, 일본 내에서도 ‘우수한 백인’과 ‘열등한 흑인’이라는 편견을 낳는 일이다. 또한 여기에서 ‘표준어 화자’의 우위성이 ‘백인성(白人性)’으로 보강되고 있다. ‘백인성으로 특징지워진 일본인’이란, 그야말로 기묘한 아이덴티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에서는 일본의 <중류성·도쿄성>을 <백인성>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일본인 중의 구별이 외국인의 발언을 통해 재생산되고 있다. 번역이란 일본의 차별관계가 글로벌하게 보강되는 장(場)인 것이다.


*‘표준어’와 ‘여성어’로 구분하여 번역한다*

그러나 현대에는 적어도 실재하는 인물에게 ‘유사방언’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지향하던 오바마 상원의원의 연설은, ‘변혁을 위한 준비가 되었는가’(지지통신 2008년2월20일), 오키나와에서 일어난 미군의 폭행사건에 관한 라이스 국무장관의 발언도 ‘매우 유감스럽다. 일어나서는 안될 사건이었다’라고 ‘표준어’로 번역되어 있다(마이니치신문 2008년2월27일자).
노동자계급의 백인이 아닌 사람의 발언도 ‘표준어’로 번역되게 되었다. 인도양 쓰나미 피해자인 스리랑카의 배고다 역장(남성· 59세)은 「助かったことはもちろんありがたい(구해주신 것은 물론 고맙다)」, 인도네시아의 크라마와티씨(여성·35세)는 「みんなにも『やれば出来るんだ』って言いたい(모두에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다)」로 남녀 모두의 발언이 ‘표준어’로 번역되었다(아사히신문 2006년12월27일자).
한편, 같은 피해자 중에서도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대피소에서 미용실을 열었던 흑인여성들은 ‘여성어’로 번역되었다. 자원봉사자인 미션씨는 「カトリーナ美容室って呼んでるのよ!(카트리나 미용실이라고 부르고 있어요!)」손님으로 방문한 안젤라 시메온씨는 「被災後初めて。うれしいわ(재해를 당한 후에 처음이에요. 기뻐요)」(아사히신문 2005년9월14일).
또한 동일인물의 발언에서 ‘표준어’와 ‘여성어’가 동시에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파리의 노숙자에게 무료식사를 제공하는 것과 관련한 기사에 등장하는 ‘프랑스인과의 연대’의 대표인 오디르 보니바르씨(51세)의 발언은 「家庭の温かさを思い出してもらえるはず (가정의 따뜻함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표준어’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무료식사 제공이 인종차별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중단된 것에 대해 그녀가 반발하는 발언에서는 갑자기 ‘여성어’가 튀어나온다. 「本当のフランス人のための炊き出しがなんでいけないの?これはフランスの価値を守る活動よ (진정한 프랑스인을 위한 식사제공이 왜 안되나요? 이것은 프랑스의 가치를 지키는 활동이에요)」(아사히신문 2006년11월21일).
 여기에서 볼 수 있는 ‘표준어’와 ‘여성어’의 구분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그 해답은 ‘남성어’에서 일어난 변화에 있다.


*강한 투지를 발산하는 히어로는 ‘おれ’, 조용하고 예의바른 남성은 ‘ぼく’*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시나리오가 1994년 일어로 번역되었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레드버틀러의 자신을 지칭하는 명사가 ‘ぼく(남성이 자신을 칭할 때 쓰는 1인칭으로, 허물없는 말)’에서 ‘おれ(남성이 자신을 칭할 때 쓰는 1인칭으로, 약간 거친 말투) ’로 바뀌었다. 소설에서 「あなたは、ぼくがこれまでいっしょに踊った女性のなかで、一番美しい踊り手です (당신은 제가 지금까지 함께 춤춘 여성 중에 가장 아름다운 파트너입니다)」라는 대사가, 시나리오에서는 「今まで俺の腕に抱かれて踊った女じゃ、君が一番きれいだ (지금까지 내 품에 안겨 춤춘 여자 중에 당신이 가장 예뻐)」로 바뀐 것이다. 한편 마찬가지로 백인남성인 애슐리는 소설과 시나리오에서 모두 ‘ぼく’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60~70년대 일본에,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투철한 의지를 발산하는 히어로가 요구된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히어로가 ‘おれ’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인의 별’에서 호시 휴마는 「見たかっ これがおれの実力だっ (봤지 이게 내 실력이야)라며 볼을 던지고, ‘내일의 조’에서 야부키 조는 「おれは あんたみたいなアル中人間、相手にしちゃいられないんだ (나는 너같은 알코올중독자를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라고 거칠게 말한다. ‘おれ’가 무모한 열혈한에게 사용되기 시작하자 ‘ぼく’는 얌전하고 예의바른 남성상과 결부되게 된다. ‘도라에몽’에서도 「ぼく、のび太 (나는 진구) 」와 「おれは、ジャイアン (나는 퉁퉁이) 」으로 구별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시나리오가 애슐리에게 ‘ぼく’를, 레트에게 ‘おれ’를 대응시킨 것은, 번역자가 ‘ぼく’와 ‘おれ’로 표현되는 남성상의 차이를 레트와 애슐리에게서 읽어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시나리오의 ‘등장인물 소개’에서도 레트는 ‘관능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무뢰한’, 애슐리는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남부신사’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일본 남성상의 새로운 구분이, 외국인 캐릭터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이러한 ‘おれ’가 ‘おまえ(おれ에 대응하는 2인칭, 너, 자네) ’가 같이 사용된 것이 청춘 스포츠드라마이다. 이런 드라마에서는, 온종일 함께 생활하면서 땀과 눈물을 통해 청춘을 나누는 ‘おれ와 おまえ’의 밀착된 관계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 대량소비사회에서 성장한 시라케세대(주로 1950~57년에 태어나 197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를 지칭)에게 ‘おれ와 おまえ’의 밀착된 인간관계는 멋있게 여겨지지 않게 된다. 또한 거품경제 붕괴후인 1990~2000년대에 들어서면 노동형태가 다양화되고 인간관계가 다원화된다. 상황마다 다른 인간관계를 조정하는 섬세한 아이덴티티 표현이 요구되었다. 상하관계와 더불어 친소(親疎)관계를 표현하는 말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인간관계 변화가 번역 언어에 반영된다*
화자, 청자, 말하고 있는 대상의 거리를 표현하는 것이 언어의 역할에서 중요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예도, 먼 관계는 ‘표준어’, 가까운 관계는 ‘여성어’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바마씨와 라이스 국무장관의 발언이 ‘표준어’로 번역된 것은, 읽는 사람이나 발언 내용과의 거리를 나타내어 정치인으로서의 객관성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다. 재해의 피해자도 여성끼리 미용실에서 편하게 서로 위로하는 친한 관계는 ‘여성어’로 표현된다. 프랑스 단체의 대표가 반발하는 내용이 ‘여성어’로 되어 있는 것은, 말하는 대상과의 거리, 즉 발언의 내용에 감정적인 몰입이 있는가의 여부로 나누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ぼく’와 ‘おれ’, ‘표준어’와 ‘여성어’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은 번역이 일본어 변화에 강하게 영향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일본의 인간관계가 변화하면 마치 외국에서도 같은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외국사람들의 발언도 구분해 번역하는 것이다.
그러면 ‘おれ와 おまえ’의 밀착된 관계가 아닌, 남성들끼리의 친밀함은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 번역에서 자주 보여지는 것은 ‘ぼく~さ’를 사용하여 약간의 거리를 둔 친밀함을 표현하는 수법이다. 이는 연령·인종에 관계 없이 배우, 뮤지션, 스포츠선수, 학생들의 발언에 사용된다.
영화 ‘리버틴’의 광고에는 주연배우인 조니뎁이 「脚本の冒頭3行を読んで、出演を即決した。後にも先にも生涯で一度しかめぐり合わない作品さ (각본의 첫 3줄을 읽고 출연을 바로 결정했다. 전에도 후에도 없을, 일생에 한번 밖에 만날 수 없는 작품이다)」(아사히신문 2006년3월30일자 석간)라고 ‘さ’를 사용했다.
축구선수인 호나우지뉴의 「バルセロナは気候も生活も、すべての面で最高の環境にある(바르셀로나는 날씨와 생활 모든 면에서 최고의 환경이다)」라는 발언은 제목에서는 ‘バルセロナの環境、最高さ(바르셀로나의 환경, 최고야)’로 ‘さ’로 바뀌었다. 기사 속의 발언에서는 「僕はストライカーじゃない(나는 스트라이커가 아니다)」로 ‘ぼく’가 선택되었다(아사히신문 2006년4월25일자). 그러나 일본 배우와 스포츠선수 중에서 ‘ぼく~さ’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여기까지 오면 번역이 일본어를 리드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일본배우와 스포츠선수가 ‘ぼく~さ’를 사용하기 때문에 번역에도 ‘ぼく~さ’를 사용한다기 보다, 해외에서 친근감 있는 인물에게 ‘ぼく~さ’를 적용함으로써 일본어 중에 새로이 ‘가볍게 남자의 친밀감’을 표현하는 언어를 창조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동시에 ‘ぼく~さ’는 외국 배우와 스포츠선수의 인간관계는 가볍다는 편견을 낳을 우려도 있다. ‘ぼく~さ’는 새로운 일본어로 정착할 것인가, 아니면 지나치게 가벼운 <외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와 결합할 것인가.
이렇게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언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번역과 일본어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역이란 일본과 외국의 아이덴티티가 글로벌하게 연관을 갖게 되는 최전선인 것이다.

 

「をちこち」 제23호(JUN./JUL.'08)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