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연정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문화산업정책실 연구실장)

 

<책 속의 일본>이라는 주제로 원고 의뢰를 받고 무슨 책이 좋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직업이 연구원인데다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가 ‘문화 산업’인지라 일본의 문화, 산업, 정책 등에 관한 각종 이론서, 에세이, 잡지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책장에서 골라 든 것은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라는 만화책이었다.

야마시타 카즈미가 쓰고 그린 <천재 유교수의 생활 – 원제:天才柳澤敎授の生活>은 현재 국내에서 24권까지 발간되었는데, 흔히 ‘망가’하면 떠올리는 자극적인 줄거리와는 거리가 먼 매우 일상적이고 잔잔한 이야기 위주의 만화이다. 그런데 바로 이 만화야말로 필자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책 중의 하나이다.
어릴 적부터 만화를 좋아했지만, 대학에 들어가면서 한동안 만화를 잊고 지내다가 결혼 후 도서대여점에서 우연히 이 만화를 발견하면서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만화를 탐독하게 되었다. 급기야 연구방향도 문화산업으로 선회하게 되었고, 만화산업에 대한 관심이 일본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레 이어져 결국 2001년에 일본국제교류기금의 펠로십이라는 기회를 통해 10개월 남짓한 일본 생활까지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필자에게 있어서 <천재 유교수의 생활>은 일본 문화에 대한 ‘호기심 촉발제’ 였다고나 할까.

 

이 만화의 주인공인 유택 교수는 60대 후반의 경제학과 교수로 매우 진지한 보수주의자다. 취침시간 9시를 어기지 않는 고지식한 인물이지만, 게이인 제자를 이해하려 애쓰는 개방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이 만화 속에는 웃음과 감동을 선사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있지만, 필자에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의 하나는 바로 ‘하나미(花見)’에 관한 에피소드(8권 제 76화)였다.
‘하나미’를 우리 말로 해석하자면 ‘꽃놀이’ 혹은 ‘꽃구경’이라 할 수 있는데, 꽃 중에서도 단연 벚꽃 구경이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벚꽃 철이 되면 일본 사람들은 벚꽃이 유명한 곳을 찾아 전부 몰려나온다. 가족, 연인, 회사 직원, 동네 사람 등 무리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무리를 지어 벚꽃을 구경하는데, 일부 회사에서는 공원 등의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직원을 아침에 파견해 자리를 깔고 저녁까지 지키도록 하기도 한다.
유택 교수에게 있어 ‘하나미’는 “인간 집단을 여러 각도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인원수는 많지만 조용한 팀”, “적은 수라도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팀” 등 천차만별의 방법으로 즐기는 사람들 가운데 새벽 5시반부터 나와 넓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불쌍한 사위를 발견한다. 8명의 회사동료에 대한 책임 때문에 화장실에도 못가고 있는 사위를 대신해 자리를 지키면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이 시종일관 웃음을 짓게 하지만, 단지 웃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이기 조차 하다. 2001년 3월 1일에 동경에 도착하면서 제일 먼저 ‘바로 그 하나미를 볼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만큼 참으로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필자가 직접 본 ‘하나미’ 풍경은 과연 “일본인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일본인들의 ‘즐거운 일탈’을 볼 수 있었겠는가. 유명한 우에노 공원의 ‘하나미’는 과연 장관이었고, 인파에 떠밀리다시피 했지만 고쿄(皇居) 주변의 ‘하나미’는 참으로 즐거웠으며, 신주쿠 교엔(新宿御苑)에서 흩날리던 벚꽃 잎은 봄눈처럼 아름다웠다.

 

하나미의 추억은 그날의 일기 속에 이렇게 남아 있다.
“... 고쿄 주변은 참 아름다웠다. 다른 성들과 마찬가지로 성 주위에는 개천이 흐르는데, 그 개천에 한가로이 백조들이 헤엄치고 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연인들이 배를 타고 있다. 그 배를 타겠노라고 엄청나게 많은 인파속에 끈기있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참으로 줄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 ”
문뜩 달력을 보니 바로 지금이 하나미의 계절 아닌가? 올해는 나도 윤중로 벚꽃놀이 인파 속에 묻혀 6년 전 도쿄의 추억을 다시 한번 더듬어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