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기념 영화제(7/1~8/29)>에 즈음하여, 세계영화사에 길이 빛나는 구로사와 영화의 매력과 영화 관람 포인트를 [7인의 사무라이],[라쇼몽],[가게무샤]등의 작품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1)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누구인가?

 

Photo Courtesy of Toho Co., Ltd.

‘사이트 앤 사운드’라는 유명한 영국 영화 잡지에서 세계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10명을 선정하는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구로사와 아키라(黑澤 明)가 포함되었다. 또한 1999년 타임지에서 20세기에 가장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20인을 선정했을 때도 구로사와는 간디, 모택동, 달라이 라마와 함께 오르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영화적인 업적은 영화 뿐 아니라 문화 및 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1910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난 구로사와 아키라는 1943년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郞)으로 데뷔해서 1993년 <마다다요>까지 50년 동안 총 30편의 영화를 만들고 1998년 우리 나이로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4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청소년 시절 서양화를 공부하다가, 무성영화 변사로 일했던 셋째형의 영향으로 영화를 좋아하게 되면서, 27세 때 영화사에 공채 조감독으로 정식 입문하게 되었다. 그는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의 연출부로 일하며 도제식 영화 수업을 받게 되었다. 특히 시나리오 쪽에 재능이 뛰어난 구로사와는 감독 데뷔이후에도 항상 모든 영화의 시나리오를 다른 작가와 공동 작업하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감독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그의 11번째 작품인 <라쇼몽>(羅生門)이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게 되면서부터다. 일본 봉건시대를 배경으로 진실의 상대성이라는 보편적인 주제에다 동양미학과 서양미학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그 작품은 현재까지 베니스 영화제 역사상 최고의 영화로 꼽힐 정도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상 일본영화가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고 구로사와의 선배 거장인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나 미조구치 겐지(講口健二)가 서양에 본격 소개된 것은 전적으로 구로사와 아키라 덕분이었다. 그는 1950년대에 영화역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한편으로 평가받는 <7인의 사무라이>(1954), <이키루>(1952)를 만들면서 최고의 절정기를 누렸고, 1960년대에는 <요짐보>(1961), <쓰바키 산주로>(1962)등의 사무라이 오락영화로 서구 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그 당시 구로사와 영화들은 나중에 여러 번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했는데, 유명한 서부영화 <황야의 무법자>(1964)의 경우 <요짐보>를, <황야의 7인>(1960)은 <7인의 사무라이>를 리메이크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자랑인 <스타워즈>의 경우엔 리메이크는 아니지만 중요한 캐릭터와 구성을 구로사와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서 노골적으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위대함은 자신의 영화를 단순한 예술영화로서 뿐 아니라 대중영화로서도 동시에 성공시켜 전 세계인들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데 있다. 그가 사용한 영화언어는 매우 쉬우면서도 강력해서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주었다. 그는 영화 속에서 일관되게 왜 세상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더 행복하지 살 수 없나를 화두로 휴머니즘을 강조했고, 때로는 도스토예프스키나 셰익스피어처럼 인간 본성 탐구에 큰 관심을 가졌다.

 

구로사와는 1970년대에 잠시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할리우드의 영화적 제자들인 코폴라, 루카스, 스필버그 등의 도움으로 <가게무샤>, <란>등으로 화려하게 복귀했고,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영화연출을 할 수 있었던 행복한 영화 거장이었다. 그런 거장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많은 걸작들을 한 자리에서 모두 볼 수 있게 기회가 온 것은 우리 영화인들과 영화 애호가들에게 큰 행운인 것 같다.

 

이정국(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