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기념 영화제(7/1~8/29)>에 즈음하여, 세계영화사에 길이 빛나는 구로사와 영화의 매력과 영화 관람 포인트를 [7인의 사무라이],[라쇼몽],[가게무샤]등의 작품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6) 칼라 시대의 영화들

 

 이미 그동안 만든 수많은 영화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둬 할리우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영화감독으로서 모든 걸 얻었을 것 같은 구로사와에게도 침체기가 있었다.

 

 1965년 마지막 흑백영화인 <붉은 수염>때까지만 해도 거의 1년에 1작품씩을 연출하던 그가 그 후 첫 칼라영화인 <도데스카덴>(1970)에서부터 유작 <마다다요>(1993)까지 23년간 7작품 밖에 만들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구로사와가 자살까지 시도했을 만큼 힘들었던 계기는 미국 영화사로부터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다룬 <도라! 도라! 도라!>라는 작품의 연출을 의뢰받았다가 중도 무산되는 사건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한 차례의 진통을 겪고 난 구로사와는 환갑을 맞이하는 시점(1970년)에서 그 자신의 영화 미학에 중대한 변화를 시도했다.

 

 <도데스카덴>에서부터 컬러를 도입한 것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1930년대 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와 같이 뛰어난 컬러 영화가 나왔고, 일본에서도 1950년대 중반에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의 <지옥문>(1954)과 같은 컬러 영화의 걸작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구로사와는 1965년 <붉은 수염>을 만들 때까지 흑백 이미지를 고집해 왔었다. 그러나 빈민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화적인 코미디로 그린 첫 칼라 영화 <도데스카덴>은 당대의 대가들인 고바야시 마사키, 이치카와 곤 등의 감독들과 공동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지금 봐도 구로사와의 대중적인 미학과 스타일이 무척 아쉬운 영화다.


 항상 완벽한 형식 미학을 지향해 오던 구로사와는 <도데스카덴>과 러시아에서 러시아 자본으로 찍은 <데루스 우잘라>를 통해 컬러를 실험한 후, 시대영화 <카게무샤>와 <란>, <꿈>을 통해 색채 영화의 미학을 완성시켰다. 이제 그의 영화에서 색채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다. 그는 색채(Color)를 도입한 이후에 많은 변화를 시도했는데, 그 중 하나가 더 이상 슈퍼맨 사무라이를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초기 작품부터 흑백 영화를 마무리할 때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서 페르소나로 등장해 자신을 대변하던 미후네 도시로와 시무라 다카시라는 배우와 작별을 고하고, 그 자리를 나카다이 타츠야가 대신했다. <도데스카덴>에서부터 시작된 구로사와 영화의 컬러 시대에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작품의 제작 주체와 전반적인 미학의 변화다.

 

 즉 그는 일본 내에서 제작자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외국 자본가에게로 눈을 돌렸고 그 결과 <데루스 우잘라>는 러시아, <란>은 프랑스, <꿈>은 미국의 제작자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완성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작품은 서구 자본으로 만들면서부터 오히려 그 미학이 보다 일본적으로 변화해 갔다. 흑백 시대 때만 해도 부분적인 양식화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인 서구 미학을 수용해 왔으나 컬러 시대로 들어서면서 갈수록 선배인 오즈 야스지로에 가까운 형식적인 엄격함과 단순성을 따라간다. 특히 그동안 드러나지 않고 은근히 감춰진 채 간혹 내비치던 구로사와의 일본적인 보수성과 우익성향도 <꿈>과 <8월의 광시곡>등 후기작을 통해 은근히 부각된다. 구로사와의 영화적인 삶과 변신 과정을 보노라면 마치 그가 일본의 정신과 역사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시기의 중요한 영화는 역시 전국 시대에 다케다 신겐 혈족이 그림자 무사를 활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모티프 만든 <카게무샤>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일본 역사를 배경으로 각색한 <란>이다. 두 작품 모두 거장으로서의 구로사와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진정 구로사와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라쇼몽>, <이키루>와 <7인의 사무라이>등과 절정기 작품들에 향수를 느끼는 것은 왜일까?

 

이정국(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