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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토 준코



어메이징 코리아 - 두 호흡의 뒤섞임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내성적 고민은 실제로 한국에 들어서는 순간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 고민이 그저 '감상'에 불과했던 것처럼, '한국'이라는 실존은 예상보다 훨씬 강한 모습으로 마주하게 된다. '다이나믹 코리아', '어메이징 코리아'. 일본인을 놀라게 하는 일들의 연속이다.

"한글이 가득한 거리. 일본어는 물론이고, 영어도 보이지 않았어요.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할 때, 큰일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한국에도 영어나 한자 표시가 많아졌지만, 30년 전에는 거의 한글뿐이었고, 대부분의 외국인에게 한글은 생전 처음 본 글씨였다. 이 기하학적인 모양을 한 글자의 어지러움을 '한글 멀미'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야마다 세쓰코에게는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김매자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당장 극장으로 오라고. 급히 달려가자 의상은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어요."

'아니, 그런 이야기 못 들었어……' 세쓰코는 생각했지만, 이미 KBS한국방송 사람들이 극장에 와 있었다. 바로 호텔로 돌아가 의상을 가지고 극장에 오니 김매자는 '자 시작합시다'라고 했다. 보니 무용수가 한 명 더 있었다. 지금 바로 즉흥적으로 둘이 같이 춤을 추라는 것이었다.

김매자가 홍보를 위해 방송국을 섭외해, 즉흥 콜라보레이션을 카메라에 담고자 한 것이었다. 사전에 아무것도 통보 받지 못한 야마다 세쓰코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됐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머리로 춤추는 무용가가 아니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만난 무용가와의 공연, 게다가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춤추라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그 한 명의 무용가의 이름은 김영희. 지금은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무용과 교수이자 한국 무용계의 리더적 존재이지만, 당시에는 김매자가 이끄는 창무회 단원이었고, 장래가 기대되는 유망한 무용가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한국무용가이고, 나와는 장르도 달라 콜라보레이션은 무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 이상하게 잘 되는 거예요. 김영희 씨는 '거절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세쓰코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그녀는 유럽의 무용수들과 호흡이 분명히 달랐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녀와 같이 춤추고 있으면 호흡이 뒤섞이는 느낌이 들었어요.

 




 

호흡이 뒤섞인다 – 서양과는 다른, 한국의 무용가들

이 때의 기억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야마다 세쓰코를 흥분시키나 보다.

"유럽 무용가와의 콜라보는 '의미'가 먼저 나옵니다. 그것을 전제로 두 댄서의 움직임과 움직임이 공연한다고 할까요. 그런데 한국무용가는 달라요. 두 사람의 몸이 있고, 호흡이 있고, 그것이 서로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융합하는……"

야마다 세쓰코에게 한국무용은 우선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민족무용이나, 전통무용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춤은 달랐어요. 적어도 창무회 무용가들의 춤은 전통이라는 테두리를 완전히 넘어섰어요."

그것은 김매자의 춤을 보고 확신했다.

"선생님의 살풀이를 보고, 그 높은 추상성에 놀랐습니다. 전통무용을 여기까지 추상화시킬 수 있는가? 아니면, 한국 춤 자체가 원래 추상성을 내재하고 있는가?"

그런 야마다 세쓰코에게 김매자는 현장에 나가보기를 권했다. 모처럼 한국에 왔으니 여러 가지를 보면 좋을 것이라고.

"그 말을 듣고 보러 간 것이 봉원사라는 절에서 이루어지는 스님들의 춤이었습니다. 승복을 입은 수많은 남성이 절 경내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죠. 때로는 열렬히, 때로는 조용히, 겉모습과는 달리 힘차게 춤추는 스님들의 모습에 말을 잃었습니다."

스님들의 춤은 김매자가 한국전통무용 발굴작업 중에서 무당춤과 함께 가장 열심히 배운 전통무용 중 하나다. 봉원사는 한국에 있는 많은 사원 중에서도 그것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보존해왔고, '영산재'라는 불교의식은 1973년에 국가 중요 무형 문화재로,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무형 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세계유산이 된 지금이야 한국의 불교 의식이 국내외로 알려졌지만 세쓰코가 그곳을 찾았을 당시, 스님들이 춤춘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일본도 오래된 불교국가이지만, 스님들의 춤을 절에서 전통예능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춤추는 염불]이나 [봉오도리] 같은 춤도 스님이 아닌 신자나 마을 사람들이 전승해온 풍습이다.

 




 

창무춤터라는 "실험극장"

세쓰코가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창무춤터'라는 공간의 열기다. 창무춤터는 김매자가 1985년에 개관한 한국 최초의 무용 전용극장이다. 야마다 세쓰코가 방문하기 전, 일본부토의 거장 오오노 카즈오도 그곳에서 워크숍을 열었다. 세쓰코는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꼭 창무춤터 이야기를 한다.

"그 작은 극장은 매우 좋은 분위기의 공간이었습니다."

어쩌면 극장이 세쓰코의 마음에 든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애초 김매자는 '이 공간과 어울리는 무용가를 소개해달라'고 연출가 이병훈에게 부탁했고, '그렇다면 이 사람이다'고 해서 택한 사람이 야마다 세쓰코였던 것이다.

"창무춤터는 작은 극장이었지만 열기가 가득 차 있었어요. 시인이 와서 시를 낭독하고, 그 옆에서 무용가가 춤을 추고. 창무회 단원인 한국무용가가 있고, 때로는 현대무용가도 있고, 또 미술가와 음악가가 협연을 하고. 그야말로 실험 극장이었습니다."

즉흥성은 한국문화의 큰 특색이다. 창무춤터에는 각 예술분야에서 앞서나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매일 실험적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나중에 한국 문화예술의 발전을 견인했다.

"그 공간이 젊은 무용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거예요. 그때 나의 춤을 보았던 사람이 중견무용가가 된 지금에서야 '그때 공연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창무춤터라는 공간의 중요성, 그것을 만들어낸 김매자의 존재가 엄청난 것이었다고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이 아시아무용축제를 계기로 야마다 세쓰코는 이후 한국에서 자주 초청을 받아,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정신이 없었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한발 물러나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조금씩 의문이 들었다.

"한국과 일본은 닮은 듯 보이지만, 이렇게나 다를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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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東順子



アメージング・コリア(1986)

 

韓国を対する日本人の内省的な思いは、実際に韓国という現場に訪れた瞬間に宙に浮いてしまうことが多い。それが単なる「感傷」に過ぎなかったかのように、「韓国」という実存はいきなり強烈である。ダイナミック・コリアはアメージング・コリア、島育ちの日本人はびっくりすることが多い。

「ますはハングル文字、というかハングル模様の街。日本語はもちろん、英語もほとんど見当たらない。空港からホテルに移動するときに、大変なことになったと思いました」

今の韓国は観光立国をめざし外国語表示も増えたが、30年前はさながら「ハングルの洪水」だった。読めないものにとってハングルは、幾何学模様の弾幕のように見える。当時、日本人の中には「ハングル酔い」と言葉で表現する人もいた。しかし、山田せつ子にはその先があった。

「ホテルに着くと、金梅子先生から連絡がありました。すぐに劇場に来いと。急いでかけつけると、衣装は持ってきたかと。」

「え、そんなことは聞いていない」とせつ子は思ったが、すでにKBSのテレビクルーも来ているではないか。すぐに踵を返してホテルに戻り、衣装を持って劇場に駆けつけるとキム・メジャは「さあ始めましょう」と言う。みると、もう一人ダンサーがいる。今すぐ即興でセッションをしろというのだった。

テレビ局はキム・メジャが宣伝のために仕込んだものだった。即興のセッションをテレビスポット用の映像にする。事前に何も知らされてなかったせつ子は、一瞬、頭が真っ白になった。が、幸いにも彼女は頭で踊るダンサーではなかった。

「着いていきなり、初対面のダンサーとのセッション、しかもテレビカメラが回っているところで踊れという。びっくりしました」

もう1人のダンサーの名前はキム・ヨンヒ。現在は梨花女子大学の舞踊家教授であり、韓国舞踊界のリーダー的存在である。当時はキム・メジャ率いる創舞会のホープであり、将来を期待される舞踊家の一人だった。

「彼女は韓国舞踊の踊り手です。いきなりセッションなんか無理だと思っていました。ところが、いざ始めてみると、踊れてしまうのです。キム・ヨンヒさんは、拒絶しない、というのでしょうか」

せつ子は慎重に言葉を選ぶ。

「不思議な体験でした。彼女はヨーロッパのダンサーとは明らかに呼吸が違うのです。なんというのでしょう、彼女と踊っていると呼吸が混ざるのです」

 




 

呼吸が混ざる――欧州とは違う、韓国の舞踊家たち

このときのセッションの記憶は、30年たった今も山田せつ子を興奮させるようだ。

「ヨーロッパのダンサーとのコラボは、意味が先にあるのです。それを前提にして、ダンサー2人のムーブメントとムーブメントが共演するというイメージ。ところが、韓国の舞踊家は違う。二人の身体があって、呼吸があって、それが混ざり合う」

山田せつ子にとって初めての韓国舞踊は、まずは新鮮な驚きだった。 「民族舞踊とか、伝統舞踊とかいうと、どうしても固定的なイメージがあります。でも、韓国舞踊は違っていた。少なくともこの創舞会の舞踊家たちは、伝統という枠を超えていました」

それはキム・メジャの舞台を見た時に核心となる。

「先生のサルプリを見て、その抽象性の高さに驚きました。伝統的な韓国舞踊をここまで抽象化できるのか。あるいは、韓国舞踊そのものが元来、抽象性を内在しているものなのか」

そんなせつ子に、キム・メジャはフィールワークを勧める。せっかく韓国に来たのだから、いろいろなものを見るといい。と

「そう言われて見に行ったのが、奉元寺というお寺で行われるお坊さんたちの踊りでした。僧衣をまとった人たちが寺の境内で歌い、踊る。時に激しく、時に静かに。砂煙を上げて踊る僧侶たちの姿は圧巻でした」

僧侶たちの踊りは、キム・メジャが韓国伝統舞踊の発掘作業の中で、ムーダンの踊りとともに最も熱心に学んだ伝統の1つだ。韓国にある多くの寺院の中で、それがもっとも原型に近い形で保存されているのが奉元寺であり、仏教儀式としての『霊山斉』は1973年に国の重要無形文化財、2009年にはユネスコの世界無形遺産にも指定されている。

「世界遺産」となったことで、今では韓国の「僧侶の舞」も内外にも知られるようになった。でも、せつ子が訪れた頃には、お寺でお坊さんの踊りを見ることなど想像もできなかった。日本も仏教国だが、韓国のようにお寺が伝統芸能として僧の踊りを保存しているという話はほとんど聞かない。踊り念仏や盆踊りなども、僧侶ではなく信者によって受け継がれている風習である。


 




 

創舞チュムトという「実験劇場」

さらにせつ子にとってインパクトがあったのは「創舞チュムト」という場所だった。キム・メジャが1985年にオープンさせた、韓国初の舞踊専用劇場である。山田せつ子が訪れる前年度には大野一雄もそこでワークショップを行っていた。

 「その小さな劇場はとても良い雰囲気の劇場でした」

 せつ子が場所を気に入ったのは当然かもしれない。というのは、そもそもキム・メジャは「この劇場空間に会う舞踊家を紹介してほしい」と演出家のイ・ビョンフンに頼んだのだ。「ならばこの人だろう」と彼が選んだのが山田せつ子だった。

 「創舞チュムトは小さい劇場でしたが、ものすごく熱のある空間でした。詩人が来て詩を朗読する。そのかたわらで舞踊家が踊る。創舞のメンバーである韓国舞踊家もいるし、時にはモダンダンスの踊り手もいる。あるいは美術家と音楽家のセッションというのもありました。それはまさに実験劇場でした」。

即興性は韓国文化の大きな特色である。そして創舞チュムト場合は、芸術分野の最先端の人々が即興のコラボを試していた。当時、この場所に集っていた人々の多くは、その後の時代の先導者となり、韓国の文化芸術の発展を牽引した。

「あの空間は若い人たちも随分影響を与え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当時、私のダンスを見てくれた人が中堅の舞踊家になった今になって、`あの頃の舞台に本当に刺激を受けました'という話をしてくれます。それを聞くたびに、あらためて創舞チュムトという場、それを作ったキム・メジャ先生の存在は大きかったと思うのです」

このフェスティバルを機に、せつ子は韓国からひんぱんに誘いをうけ、例年のように彼の地を訪れるようになる。当初は無我夢中だったが、回を重ねるたびに状況が俯瞰できるようになる。すると、疑問も少しずつ湧いてきた。

「日本と韓国は似ているようで、こんなにも違うのか」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