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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토 준코



일본적인 것에 대한 반감과 공감


이 부토페스티벌이 한국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진 걸까?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 등을 보기 위해서 "예술자료원"을 찾았다. 창무회 자료들도 여기에 기증됐으며 순서대로 아카이브화 된다고 한다. 이 연재를 진행하면서도 이 곳에 보관된 사진 자료를 빌려 쓰기도 했다. 다행이 여기에는 "도쿄국제연극제' 88이케부쿠로"등 공연팜플렛 이나 전단들도 잘 보관되어 있다.
멋진 자료보관실을 보면서, 지난 20여년 사이에 한국문화예술을 둘러싼 환경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김매자가 포스트극장 세운 동기 중의 하나였던 "무용전문건물을 지어 거기에 도서관을 만들어 자료를 보관 하겠다 "는 뜻을 정부가 제대로 이어받아 실현해 준 것 같았다.

1993년 여름의 부토페스티벌에 대해서는 [무용예술](현: 월간[몸]) 1993년 7.8월호가 예고편으로 부토 특집을 짰고 공연 평으로는 월간<춤>의 무용평론가 김태원 씨의 글이 있다.
"창무예술원이 주최하고 포스트극장에서 열린 [부토~세기말의 계보] (8월20일~9월4일) 페스티벌은 춤 단체의 기획에 의한 아마도 가장 알차며 대중의 호응을 많이 얻었던 국제적인 춤 교류의 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행사가 아니었나 싶다. "(월간[춤] 10월호"몽상과 은하의 무용 형식"p82)

"이것은 아마도 일본이 최근에 급속히 선진화 되어가는 속에서 우리의 질시나 경멸감, 적의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증거 아닐가 싶다"(상동 p82)

김태원 씨의 공연 평에는 여러 작품에 대한 언급도 있어서 흥미롭긴 하지만 작품 평가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여기서는 월간<객석>에 게재된 이상일 씨의 "일본적인 것에 대한 반감과 공감 ― 창무 예술원 일본부토페스티벌")의 내용을 첨부한다.
"반공교육과 함께 반일교육을 철저히 받은 세대일수록 '일본적인 것'은 그대로 반감 유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 있어서 일본적인 것은 유행의 대상일 뿐이다"(월간[객석] 1993년 10월호 p238)
김태원 씨는 "대중의 관심"에 주목했는데 이상일 씨는 " 젊은 세대" 에 대해 이렇게 언급 한다.

"기성 세대인 나는 반감과 공감의 기묘한 심정으로 공연을 지켜본 반면 젊은 세대들은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만 두드러져 보였다"(동상)
이 글들이 모두 일본어로 번역되어 [서울의 일본부토페스티벌]라는 책자에도 실어졌다. 이 페스티벌에 대한 한국인들의 마음속 갈등이 과연 일본 친구들에게도 잘 전달이 되었을까?


 



 



서울은 [부토적]이다

1970년대부터 부토의 사진을 계속 찍었던 사진가 고 카미야마 테이지 로(1948~2014)은 "부토성" "부토적"라는 말을 자주 썼다. 60년대 말 일본에서 태어나고 유럽에 간 "부토"(BUTOH)는 그 충격을 받은 자에게는 마치"하나의 철학" 이었다. 소설가나 시인들 중에는 부토에 대해서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사진가는 그저 묵묵히 "부토적 순간"을 찍어둘 뿐이었다.
지난 호와 이번 호에 개재된 부토사진은 '카미야마'가 사진담당으로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16일간 이어진 공연을 찍어둔 기록의 일부다. 말이 별로 없는 그였지만 처음 방문한 서울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고 칭찬의 말을 전했다.

"여기는 너무 [부토적]이다"

지난 호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 페스티벌에서는 일본인 댄서만 춤을 췄다. 국제 페스티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댄서들의 경연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 댄서들이 호흡을 맞춰야 할 상대방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인이라는 사람들, 그리고 서울이라는 도시였다.
카미야마와 마찬가지로 70년대부터 부토의 곁에 있던 조명가 아이카와 마사아키(1949~2010)는 이 페스티벌을 계기로 그 뒤에도 계속 한국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도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생전에 "왜 우리가 서울을 선택했나?"라는 질문에 스스로 이런 대답을 남겼다.

" 움직이고 있다.. 다양하게. 그 방향은 일정하지 않는다. 그런 방향에 부토를 가져가는 것이 나는 찬성한다. 아티스트와 관객이 일정한 상황에 잡아매면 안 된다. 서울은 그 조건에 딱 맞다. 평가는 항상 50%50%가 좋을 거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다"([서울의 일본부토페스티벌])

김매자는 "지금 부토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한국무용계 전체에게 필요하다 "고 했지만 이것은 일본 부토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서양이 아니고 같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부토를 어떻게 보는가, 그것을 몸으로 느껴야 더 하나의 길이 생길 수 도 있다. 적어도 여기서 동양적 신체는 보색 역할도 못한다.

마지막에 남상길이 23년전 축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축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모든 공연을 볼 수 있는 전체관람권을 구매한 사람 중에서 포스트극장 앞의 거리를 매일 철협 소리를 울리며 리어카를 끌고 고철을 모으고 다니던 청년이 있었어요. 조용하고 아주 맑은 표정의 이 청년은 마지막 토론회까지 참석해 주었습니다. 이런 청년이 한국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이번 페스티벌은 의미 있는 기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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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東順子



日本的なるものへの反感と共感


 この舞踏フェスティバルは韓国の人にどう受け止められたのだろう? 当時の新聞や雑誌の記事などを見ようと、「芸術資料院」を訪ねた。 創舞会の資料などもここに寄贈されており、順番にアーカイブ化されているという。この連載をしなから、ここに保管されている写真資料をお借りしたこともあった。とくにありがたかったのは、「東京国際演劇祭'88池袋」などの公演パンフレットやチラシの類も、ここで大切に保管されていたことだ。
立派な資料保管室を見ながら、この20年余りで韓国の文化芸術をめぐる環境は素晴らしく充実したのだと、あらためて思った。

 「舞踊専門の建物を建てて、そこに図書館を作って資料を保管する」という、キム・メジャのポスト劇場建設の動機の1つは、政府がその志をきっちりひきついでくれたようだ。  1993年の夏の舞踏フェスティバルについては、月刊『舞踊芸術』(現・月刊『モム』)の1993年7・8月号が予告編としての舞踏特集を組んでいる他、月刊『演劇』などにも紹介が掲載されている。公演評としては月刊『チュム』に掲載された金泰源氏の文章がよくまとまっている。  「創舞芸術院が主催し、ポスト劇場で開かれた<日本舞踏フェスティバル>は単一の舞踊団体の企画による、おそらく最も盛大で大衆の共感を得た催しだっただろう。それは、国際的な舞踊交流の成果の一端を見せてくれたものだった」(月刊『チュム』10月号「夢想と散開の舞踊形式」p82)

 キム・テウォン氏は冒頭から「大衆の共感」にとりあげており、その後の文章では日韓関係の変化にも言及している。

 「これはおそらく、日本が急速に先進化される中で私たちの嫉妬や軽蔑、敵意の対象とされるのではなく、かえって関心の対象となっている証拠ではないか」(同上 p82)

 金泰源氏の公演評には、それぞれの舞踏家への作品への言及もあり、とても興味深いのだがここではふれない。一方で日韓交流という、この連載のテーマに沿うなら、月刊『客席』に掲載された、李相日氏の「日本的なるものへの反感と共感―創舞芸術院の日本舞踏フェスティバル」)が、とても重要である。

 「反共教育とともに反日教育を徹底的に受けた世代ほど<日本的なるもの>はそのまま反感誘発の対象となりやすい。しかし、若い世代にとって日本的なものは流行の対象であるだけだ」(月刊『客席』1993年10月号)

キム・テウォン氏は「大衆の関心」という書き方をしていたが、李相日氏は冒頭から「若い世代」と世代差に言及している。

「既成世代である私は反感と共感の共存する奇妙な思いで公演を見守っていたが、一方、若い世代らは見慣れるものに対する好奇心だけが際立って見えた」

こちらの文章はいずれも日本語に翻訳され、『ソウルの舞踏フェスティバル』という小冊子に転載された。このフェスティバルに対する韓国の人々の複雑な思いは、日本の関係者にも伝わったと思う。




「舞踏的状況」の拡散

 1970年代から舞踏の写真を撮り続けた写真家、故・神山貞次郎(1948~2014年)は、「舞踏性」「舞踏的」という言葉をよく使っていた。70年代の日本に出現し、欧州で現代アートの最前列に迎え入れられた「舞踏」(BUTOH)は、その衝撃を受けた者にとって、あたかも「一個の哲学」のようであった。小説家や詩人などの中には、舞踏の概念について饒舌に語る者もいたが、写真家の仕事はその「舞踏的瞬間」を写し撮ることだった。

 前月号と今月号に掲載した写真は、神山が日本側の記録スタッフとしてフェスティバルに参加し、16日間の舞台を撮り続けた記録の一部だ。語ることに控えめだった彼だが、初めて訪れたソウルの街がたいそう気に入ったようで、彼にして最大の賞賛の言葉を発していた。

「この街は、とても舞踏的だ」

前回もふれたように、このフェスティバルでは日本のダンサーだけが舞台に立った。国際フェスティバルの常套である国をまたいだダンサー相互のコラボレーションはなかったが、代わりに日本からきた舞踏家との共演を買ってでたのは、韓国という国であり、韓国人という人々であり、そしてソウルという街だった。

神山と同じく70年代から舞踏の傍らにいた照明家の相川正明は、このフェスティバルをきっかけに、その後も継続して韓国の舞台に関わることになる。彼もすでに故人となってしまったが、「なぜ僕らがソウルを選んだか」という問いに、自らこんな答えを残している。

「動いているのである。多種多様に。その方向は一定せず。そういう方向に舞踏を持っていくのは大賛成である。創造するものと観客が一定の状況に括られるのはよくない。ソウルはその条件にぴったりである。評価はいつも50%50%がいいと思っている。おそらく今回もそうである」(『ソウルの日本舞踏フェスティバル』)

キム・メジャは「韓国の舞踊界全体にとって、日本の舞踏からじっくり学ぶことは、今、最も必要なこと」と言ったが、日本の舞踏家たちにとってもそれは同じ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欧米ではなく、同じ東アジアの国の観客の前に立つこと。そこでは東洋的身体は補色の役割すらもしない。

最後に、南相吉は23年前のフェスティバルについてこう語った。

「一番印象に残っているのは、全公演を観ることができる通し券を買った人の中に、ポスト劇場の前の道を毎日のように、鉄鋏をカチンカチンと鳴らしながらリヤカーを引っ張ってくず鉄を集めていた青年がいたこと。とても清々しく穏やかな表情のこの青年は、最後のシンポジウムまで参加してくれました。このような青年が韓国にいるということを知っただけで、僕にとっては意味のある企画だったと思うのです。」


 



PROFILE

이토 준코

아이치현 출생. 기획・편집・번역 오피스인 JP아트플랜 대표. 1990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 저서로 『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등이 있다.

PROFILE

伊東順子

愛知県豊橋市生まれ。企画・編集・翻訳オフィス JPアートプラン代表。1990年に渡韓。著書に『もう日本を気にしなくなった韓国人』(洋泉社新書y)、『ピビンバの国の女性たち』(講談社文庫)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