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성욱 (문화학교 서울 대표, 영화평론가)

 

▲ 윤복이의 일기
ATG 영화란 예술영화의 배급과 상영을 위해 1961년 설립된 ATG(아트 시어터 길드Art Theater Guild)와 더불어 만들어진 특별한 시기의 일본영화를 일컫는 말이다. ATG는 일본 전역에서 10개의 예술영화전용관을 통해 ‘예술 및 독립영화’를 전문적으로 관객에게 소개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독립제작사들과 함께 1천만엔이라는 예산으로 실험적이고 과감한 독립영화들을 직접 제작하여 그 작품들을 상영하는 데 주력해온 단체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ATG의 역할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일본영화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ATG는 60년대 이후 일본영화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올해 ‘전주영화제’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이러한 ATG 영화의 특별한 미학과 정치학을 가늠해볼 수 있는 행사가 열린 바 있었다. 이번 특별전에는 당시 ATG의 구심적인 역할을 한 극장인 ‘신주쿠분카’의 지배인이자 ATG 자주제작 영화를 제작했던 구즈이 킨시로씨가 참석하기도 했었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ATG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구즈이 킨시로씨의 증언에 따르면 ATG는 1961년 도호와 도와 등 5개 회사가 200만엔씩 출자하는 형태로 1천만엔의 초기자본을 모아 설립되었다고 한다. ATG는 전국에서 10개관의 아트시어터를 확보했는데, 이 극장들은 대개 200석 정도 규모의 크지 않은 극장이었다. 당시에는 외화에 수입제한이 있어서 각 배급회사별로 할당 편수가 정해져있었다. 따라서 예술성이 높은 영화라도 상업성이 별로 없다고 판단되면 그런 영화는 개봉이 힘들었다. ATG는 상업성과는 크게 상관없이 ‘세계의 명화를 모아서 상영하는 아트시어터’라는 컨셉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상영되는 아트필름의 수입은 주로 도호나 도아, 쇼치쿠와 그 외의 작은 배급사들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ATG 극장에서의 상영 원칙은 흥행과 관계없이 한 영화를 1개월 이상 상영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관객들은 주로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젊은이들에게는 아트시어터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이 상당히 세련되고 멋진 행위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ATG가 영화제작에 나서게 된 것은 60년대 중반의 일이다. 1966년 외화수입제한이 사라지면서 일반극장에서도 고다르를 비롯한 유럽의 예술영화들이 많이 상영되게 됐고, 그러면서 기존의 아트시어터와 차별화된 점을 찾기 어려워지면서 뭔가 특징적인 것을 찾아내야겠다는 생각으로 ATG가 직접 영화 제작에 나섰던 것이다. 그 시초가 된 것이 오시마 나기사의 <윤복이의 일기>와 <닌자무예장>이다. 당시 오시마 나기사는 <일본의 밤과 안개>가 상영금지 조치된 이후 몇 년 동안 영화제작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가 TV의 의뢰를 받아 한국에 촬영을 갔을 때 찍었던 스탈 사진에 내레이션을 입혀 완성한 작품이 <윤복이의 일기>이다. <닌자무예장>은 당시 인기있던 원작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한 작품. <윤복이의 일기>와 <닌자무예장>이 ATG를 통해 배급되면서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1천만엔 정도의 예산으로 영화를 만들면 흥행에 무리가 없다는 판단 하에 ATG와 감독이 예산을 반씩 부담하여 1천만엔의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만드는 시스템이 마련되었다. ATG는 당시 소속이 없는 감독들에게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었고 능력과 재능이 있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영화를 만들 수 없었던 감독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 살인의 낙인
ATG 영화의 이러한 자주상영, 자주제작의 역사는 당시의 시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가령, <천사의 황홀>을 만든 와카마츠 코지 감독은 ATG의 정신이 ‘시대의 양심’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 ATG 영화는 그의 말처럼 60-70년대의 일본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와 분리할 수 없는 특별한 영화들이다. 이 시기 일본영화문화는 놀랍게도 전세계와 거의 동시적으로 호흡하고 교류하며, 발언하고 있었다. 가령, 1968년 일본은 혁명기운으로 충만했던 당시의 파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고, 이 시기 ATG를 통해 일본에는 알랭 레네, 요리스 이벤스, 장 뤼 고다르 등의 감독이 참여해 베트남 반전운동의 메시지를 담은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져>라는 영화가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ATG 영화와 관련해 사실 가장 주목해야할 것은 이 시기의 일본영화가 어떤 ‘불가능성의 위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영화상영의 불가능성, 영화제작의 불가능성, 그리고 영화 그 자체의 불가능성에 대한 자각,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영화를 가능케 하려는 시도. 이것이야말로 ATG 영화가 지닌 특별한 성격이라 할 수 있다. 메이저 스튜디오 촬영소 시스템에서 영화가 더 이상 불가능해졌을 때, 일본영화는 ATG를 통해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획득해냈다. 아마도 ATG가 없었더라면 60년대-70년대의 일본영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 영화의 가능성이란 크게 보자면 네 가지 계열을 지니고 있었다. 그 첫째는 오가와 신스케로 대표되는 자주제작, 자주상영 운동의 전개와 더불어 진행된 다큐멘터리의 계보이며, 두 번째는 오시마 나기사처럼 ATG를 중심으로 제작, 배급을 이뤄낸 작가영화, 세 번째는 야쿠자 영화와 와카마츠 코지 감독의 핑크영화의 계열, 네 번째는 아방가르드, 언더그라운드 시네마와 같은 전위적 계열이 그것이다. 이 서로 다른 계열의 영화들이 이 시기 일본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ATG 영화와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 상징적인 시기, 1968년과 1972년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먼저 학생혁명이 들끓던 1968년. 이 시기 스즈키 세이준은 닛카츠에서 <살인의 낙인>을 완성한 후 해고당하는 수모를 겼었는데, 이는 그의 불운뿐만 아니라 일본영화촬영소 시스템의 위기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세이준의 작품 <살인의 낙인>은 지극히 전위적인, 거의 추상적인 유희라 할 수 있는 영화로 용의주도하게 착각과 환영을 이뤄내는 허구적인 영화의 가능성을 그것의 극한, 영화의 불가능성까지 끌어당기는 시도를 담아낸 영화였다. 이러한 불가능성은 또한 그 반대의 지점, 즉 오시마 나기사가 같은 시기 ATG에서 만들어낸 <교사형>에서 가능성의 단초를 마련한다. 또 다른 시기. 정치와 영화가 퇴락하던 1972년 또한 지극히 상징적인 시기이다. 이 시기 오시마 나기사는 <의식>을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ATG 1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자 정치와 영화에 대한 결산을 시도한 작품으로 오시마 나기사는 이 작품을 뒤로 ATG를 떠났다. 하지만 동일한 때에 와카마츠 코지는 <천사의 황홀>에서 투쟁의 ‘기록’이 아닌 투쟁을 ‘촉구’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불가능성에 직면해 가능성을 추구하려 했던 시도, 이것이 ATG 영화의 시대정신이었다.       

 

ATG 영화는 7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쇠락해갔다. 1974년 알랭 레네의 <뮤리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로프>를 마지막으로 ATG를 통한 외국의 예술영화소개가 마감되었고, 한 작품을 한 달 이상 상영한다는 원칙 또한 점점 어려워졌다. 70년대 후반에는 일본영화계 전체의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졌기 때문에 ATG 자체도 점차 상업적인 고려를 많이 하게 되었다. 신주쿠분카에서 상영된 마지막 ATG 제작영화는 1974년 테라야마 슈지의 <전원에 죽다>이다. 구즈이 킨시로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도호에서는 이 작품 대신 프랑스 에로영화인 <엠마뉴엘>을 상영하라는 압력을 강요했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전원에 죽다>를 상영할 수는 있었지만 도호와 많은 마찰이 있었고, 결국 신주쿠분카는 ATG 상영관의 역할을 그만 두게 되었다. 결국 70년대 후반을 거치며 ATG는 일본 영화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본영화의 불모의 시기에 영화의 가능성을 일깨운 ATG 영화의 정신은 일본영화사에서 아마도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