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경숙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센터 연구원)

사료 연구에 일생을 바친 전직 대학교수가 남은 여생을 다 바치기로 마음먹은 고대 유물 역사관에서 권고 사직을 요구 당한다. 유물발굴 및 복원을 삶의 최고 가치이자 보람으로 살아온 다카노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대표적인 노인성 치매질환인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것이다.
다카노는 자신의 직업 이외에는 별다른 재주나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딘지 가장으로서의 위엄 같은 것이 느껴진다. 예전에 아버지들의 큰소리가 통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말이다. 그것은 일본에서 아직은 부권이 상실되지 않은 태평양 전쟁 이전의 세대라는 것이 전반부에 잘 드러나 있다. 아직 현대화 되지 않은 그의 거주 공간 집에서도 표면화될 뿐만 아니라, 내조에 한없이 충실한 부인의 모습이 뚜렷이 각인된 가정 생활을 통해 내면화 되기까지도 한다.

치아키 미노루 주연의 꽃 한 잎(원제: 花いちもんめ)은 70세를 넘긴 치매에 걸린 한 시골학자를 둘러싼 가족사를 시니컬하고 적나라하게 다룬 영화이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사회가 되기 시작한 일본에서 알츠하이머형 노년 치매병 문제를 홈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여 주제화 한 사회성이 짙은 작품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노인의 평균 수명이 높아지면서 이런 저런 노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실정이다. 특히 노인의 가족 안에서의 불편한 위치 및 노인병 등이 점차로 그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치아키 미노루가 열연한 노인 연기는 압권으로 1985년 일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획득했다. 치아키 미노루는 1917년생 홋카이도 출신으로 1949년 구로사와 아키라(黑 澤明)감독의 작품 <들개>로 영화에 데뷔한 이래 구로사와 감독의 단골 출연진으로 활약하면서 입지를 굳혔고, 일본영화 전성기인 1950년대와 60년대의 명작에도 다수 출연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1987년까지 160여 편에 달하는 작품에 출연한 베테랑 배우이다.


타이틀 자막이 뜨고 역사관에서 사직을 권고 당하는 그 문제의 신이 스크린을 채울 때까지 마치 기록영화 식의 이야기 진행으로, 사건의 전개 방식이 감정이입보다는 나열하는 식의 객관적인 형태를 유지한다. 담담하고 더 나아가서는 냉랭하게 다카노의 행적을 따라가며 보여줄 뿐, 영화의 시선에는 어떠한 비판이나 감정도 담겨있지 않다.
치매증세가 심해지는 가운데 부인이 쓰러지게 되면서 다카노는 오사카에 사는 아들 하루오의 집으로 옮겨와 며느리 게이코의 신세를 지게 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비로소 출발한다. 처음에는 주로 건망증, 방향감각 장애 등이 나타나면서 오래 전의 것들은 다 기억하지만 유달리 방금 전에 세었던 숫자도 거꾸로 세지 못하는 식으로, 방금 지나간 순간들은 망각하고 잊어버린 이야기가 된다. 가족도 못 알아 볼 뿐 아니라 용변도 못 가린다. 피해 망상증, 우울증, 환각 분노에서 폭력적 경향까지 치매성 징후들이 총체적으로 나타난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치매를 '노인네가 고령으로 망령이 난 것'으로 생각해 '부끄러운 정신 질환' 정도로 의미를 애써 축소해 집안에서 쉬쉬하며 덮어버릴 정도였는데, 극중의 다카노도 치매환자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은 다 한다. 하지만 그가 정신이 있을 때 써 놓은 “노망이 나도 사람은 살아가는가! 살고 있다.”는 대목은 치매 노인의 심리를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부분으로 치매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드문 병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올 수 있는 흔한 질환이구나 하는 경각심마저 들게 한다.
노망이 나서 제 정신이 아닌 타카노의 심리에 대한 이해 부족이 원인이 되어 결국 가족 간의 감정대립이 극도에 달하면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하지만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단지 치매노인을 둔 가족의 어려움과 극복의 드라마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몽시대의 토기가 깨지고 한 인간의 삶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돌이킬수도 추스릴수도 없는 상황이 되지만 잃는다는 것이 모두 다 나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새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겉으론 아무 문제없이 보이며 평범한 중산층 가정인 아들부부 사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믿음이 깨져 치매 아닌 치매상태에 의존하는 알코올중독자 며느리가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이기에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명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노망난 할아버지가 그들의 천사일 줄이야 그 누가 알았을까. 핵가족화로 인해 노인의 자리를 부정하고 부권의 부재를 실감하는 현시대에 거울이 될 수 있는 최고의 가족영화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며느리 역의 도아케 유키요(十朱幸代)이다. 그녀는 배우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15세에 연예계에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영화와 무대를 오가며 활약의 장을 넓혀, 개성 강한 여배우의 이미지로 자리 매김 하였다. 영화에서만 무려 75편의 작품에서 주연역을 맡은 중견 배우이다. 2003년에는 각 분야(학술연구, 문화예술, 기술개발 등)에 각 분야 최고의 인물들에게만 수여하는 일본 정부 훈장까지 받는 영예를 누렸다.
큰딸 역의 노가와 유미코(野川由美子) 또한 액션물에서 희극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연기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배우이다. 그 밖의 부인 역의 가토우 하루코(加藤治子)도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TV와 영화를 병행하면서 활동하는 존재감이 큰 배우이다. 나이 든 배우들의 조연 역할 분담이 잘 되어있다. 영화의 빈틈을 메꾸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점이 일본영화의 장점인데, 그러한 역할에 큰 버팀목이 되는 배우들이 많이 등장하는 영화로써 볼거리 또한 다채롭다.

* 본 페이지의 게재된 사진의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